망각의 미학, 삶의 여백

박말임 작가

단골집이란 매번 주문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서 챙겨주는 그런 곳 이 아닐까. 여성에게 미용실은 예민하고 중요한 공간이다. 예고도 없이 단골 미용실이 문을 닫고, 폐업 안내문만 덜렁 붙어 있으면 낭 패감이 몰려온다.

나는 스스로를 까칠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음 에 드는 미용실을 찾기란 쉽지 않다. 머리숱이 적고 머리카락이 가늘 어, 어렵게 한 파마가 샴푸 한 번에 다 풀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늘 “뽀글뽀글하게 볶아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여야 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단골 미용실을 정하기까지는 여러 조건이 맞아떨 어져야 한다. 미용 시술도 중요하지만, 요금, 손님을 대하는 태도, 집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도 고려 사항이다. 그러한 요건을 거쳐 내가 정한 단골은 ‘수 미용실’이었다. 그곳을 다닌 지도 어느새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나는 그 단골 미용실을 언젠가부터 다니지 않게 되었다. 단 골이 된 곳을 왜 다니지 않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 만 자존심 상했던 일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문득 ‘다람쥐의 망각’을 떠올랐다.
내 기억의 한계는 나이 탓도 있겠지만, 대체로 상대가 내게 중요한 사람이 아닌 경우, 다람쥐의 망각처럼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본래 낯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어려워했다. 타인에 게 상처를 쉽게 받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아 혼자 분노하고 억울한 마음 때문에 우울해 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되 도록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 ‘당신은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지나치는 사람일 뿐이에요.’ 이런 마음속 방어벽은 편협한 인 간관계를 만들게 했다. 이것이 마음을 단련하는 방법이라 여겼지만, 때로는 오히려 삶의 균열을 낳고 생채기를 남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한번 마음의 문을 연 사람에게는 끝까지 의리를 지키 려는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그래서 유연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며 자신을 돌아보지만 오랜 세월 굳어진 생활 태도가 바뀌긴 그리 쉬 운 일이 아니다.

며칠 전, 별생각 없이 불쑥 그 ‘수 미용실’을 다시 찾았다. 미용실 주 인은 반색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우리 미용실을 버리고 다른 데 다 니셨어요?”라며 서운하다는 듯 애교스럽게 눈 흘기는 시늉을 했다.

파마 마무리 단계로 미용실 주인이 드라이기로 내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였다. 거울 속에 파마 비닐 모를 쓴 채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왜 내가 이곳을 떠났었는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할머니는 중화제를 바른 채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파마 중화제는 보통 15분 정도면 충분하다. 시간이 길어지면 머릿결이 상한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미용실 주인은 손님들이 그런 약품의 특성을 잘 모른다는 점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그런 푸대접을 받는 이들은 노인이다. 

나는 미용사 자격증이 있어 중화제 부작용에 대해 조금은 안다. 그 당시 나 역시 그런 취급을 받아 불쾌하고 서운해 발길을 끊었던 것이다.

이 미용실은 예약제로 운영하지만 예약 없이 찾아오는 뜨내기 손님도 다 받는다. 예약제가 아니라면 중화제 처리가 조금 늦어진다고 해도 이해하고 남을 일이다. 소중한 내 시간, 돈을 지불하면서 이런 부당한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는 않았다. 남의 가게 영업에 대해 단골이라고 참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안 가면 그만이지’ 그렇게 마음속으로만 정리하고 발길을 돌렸었다.

다시 찾은 미용실은 예전 같지 않았다. 손님도 줄었고 분위기도 침체되어 있었다. 경기가 어려워서일까. 아니면 나처럼 마음의 상처를 받고 떠난 손님들이 많았던 걸까.

다람쥐는 도토리를 땅속에 묻어두고 이내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 덕분에 숲이 울창해진다고 한다. 다람쥐의 망각이 아름다운 숲을 만드는 셈이다. 어쩌면 망각은 꼭 필요한 삶의 여백일지 모른다. 살아오며 겪은 상처와 실망을 모두 기억하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끝없는 고통의 연속일 것이다.

내가 그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을 망각하고 다시 찾은 것이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꽁한 마음으로 지난 일을 들추는 일은 옹졸한 여인네의 편협일 뿐이다. ‘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며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되었다. 

게다가 그 미용실 주인은 내게 중요한 인물도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 상처받을 일도 없는 것이다.

그 미용실에서의 일은 내 인생의 수많은 점 중 하나에 불과한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니 말이다. 그저 다람쥐의 망각처럼 흘려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 삶의 여백은 넉넉한 쉼이 되는 그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작가 박말임

필명 박진욱. 월간 ‘수필문학’ 등단. 불교일보 문학상 수상. 청주문인협회 회원. ‘경남일보’ 경일춘추 필진 활동(2014·16·25). 지역아동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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