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동거

안덕일 작가

요즈음 하루를 아침 산책으로 시작한다. 산책에는 아내와 강아지 두 마리가 동행한다. 푸들로 소형견이라서 어미가 되어서도 강아지로 부른다.

출근하는 아내는 종종 산책에 빠지기도 하지만 강아지들은 언제나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은 엄마와 딸 사이로 올해로 열네 살과 열세 살이 되었다. 사람 나이로 치면 중노인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름은 어미가 소중이요, 새끼는 리소다.

처음 집으로 데리고 왔던 딸아이가 지은 이름이다. 나는 원래 강아지 기르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이름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따라 불렀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작명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소중이란 이름은 짐작대로 소중하다는 의미고 리소는 소중이가 낳았으니 리틀 소중이란 뜻이라고 한다. 아내와 딸이 애지중지하는 걸 보면 이름을 제대로 지은 것 같다. 그들의 족보는 이상해서 아내와 딸은 자칭 강아지의 엄마라고 한다.

강아지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소중이가 세상에 태어난 지 두 달이 지날 즈음이었다. 그때는 내가 공직에 근무하고 있을 때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와 보니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하듯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며 반겼다.

나는 강아지가 싫지는 않지만, 아파트에서 기르는 것은 반대했다. 위생상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돌보는 일이 어려울 거로 생각했다. 강아지를 길러 보았던 친구로부터 나이가 들면 어르신을 모시는 것보다 힘들며 그들에 밀려 가장의 대우도 못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러자 아내는 “아는 할머니가 미국에 가면서 잠시 맡아 달라고 했으니 며칠만 참아주세요.”라고 했다. 당시 아내와 딸이 내가 강아지와 정이 들기를 기다리겠다는 속셈을 알아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데려온 강아지를 돌려줄 수도 버릴 수도 없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들의 뜻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시간이 흐르며 소중이는 리소를 낳고 나는 차츰 그들에게 정이 들어갔다. 그리고 돌보는 일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나의 몫이 되었다.

이른 아침이면 강아지는 밖으로 나가자고 졸랐다. 그 시간은 내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시간이다. 문이 닫혀 있으면 문을 긁어 대고, 열려 있으면 들어와 내 다리를 긁어댔다.

그들에게 이끌려 반강제로 산책하러 나간다. 공원을 돌며 배변을 시키고 운동도 한다. 그래야 지쳐서 잠을 자니 그들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퇴직을 앞두고 뒷동산에 올라 공직 선배를 만난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며 산책을 했다.

퇴직하면 나도 저들과 어울려 산책을 하겠다고 소박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강아지들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즐거운 산책 대신에 강아지 뒤를 쫓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봉지를 들고 다니며 그들의 배설물을 치우고 낯선 사람이나 이웃 강아지를 만나면 갑자기 짖어대는 바람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강아지의 배변을 치우고 산책하는 시간은 그래도 운동하는 셈 치자고 스스로 위로한다. 집에 들어오면 아내는 출근을 서두르고, 나는 산책을 한 강아지를 씻기고 밥을 챙겨 준다. 그들이 밥을 먹을 때 나도 식사를 시작한다. 그래야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금방 밥을 해치우고 나를 지켜본다. 눈길을 피하여 식사를 하다 곁눈질로 그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식탐으로 가득 찬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들의 간식을 집어 든다. 배불리 먹고 나가떨어지라고 간식을 주지만 그들은 버릇이 되고 그런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아내와 딸아이가 그걸 보기라도 하면 음식을 통제 못 한다는 둥 비만이 된다는 둥 말이 많았다. 그럴 땐 직접 관리하라고 쏘아붙이곤 한다.

그들도 맛있는 음식을 놓고 적당히 먹는 게 쉽지 않아 과식하고 후회하는 것도 숱하게 보았다. 자신들도 통제를 못 해 몸이 만만치 않은데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맘껏 못 먹게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에 강아지 눈칫밥을 먹고 가족들과 티격태격할 때면 불편한 동거가 얼마나 계속될는지 그들의 나이를 헤아려본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는 줄도 모르고 밥을 주고 산책을 시켜주니 가장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다. 틈만 나면 꼬리를 흔들며 놀자고 졸랐다. 그런 강아지에게 아무리 짐승이지만 죄를 짓는 것 같아 늘 편안한 마음이 아니다.

돈이 들어가거나 틈틈이 할 수 있는 예방접종, 미용, 예뻐해 주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바깥일을 하면서 쉽지 않지만 자식을 대하듯 사랑을 다 준다. 싫어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방에 대변이나 소변을 실례해도 미워하지 않았다.

내가 하루만 씻지 않거나 땀을 흘리면 냄새가 난다고 하지만 강아지는 일주일을 안 씻어도 내색하기는커녕 꼬리만 흔들면 안고 빨고 좋아한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주인을 향한 충성심과 말 못 하는 짐승이라 그렇다고 했다. 진돗개도 아니고 푸들이 무슨 충성을 하며, 말 못 하는 사람하고는 하루도 살지 못할 텐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들을 강아지 호텔에 맡기고 휴가를 떠난 적이 있다. 휴가에서 돌아와 호텔을 찾아가 그들의 동태를 몰래 지켜보았다.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분명하다. 촉촉이 젖은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호텔 주인께서 삼일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주인을 기다렸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주인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을 확인하고 어느 정도 그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오랜 시간 집을 비울 때면 그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게 되었다.

내가 강아지와 불편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딸아이가 당분간 돌봐 주겠다고 했다. 그들을 데려가는 날이다. 먼저 눈치채고 앞장을 섰다. 자기들 뜻대로는 가고 싶은 곳도 갈 수 없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무슨 일이나 빨리 포기하는 것 같다. 오랫동안 운동시켜 주고 밥을 주며 돌보아 준 공덕을 모르는 것인지 원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건지 순순히 따라나서니 마음이 편했다.

강아지가 떠나고 나자 그들이 지내던 주변을 청소했다. 그들의 놀이터이던 소파도 말끔히 닦았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과일도 깎아 먹고, 대자로 누워 뒹굴기도 하며 나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고 날아갈 듯하였다. 며칠 후 그들이 우리 집으로 돌아와 불편한 동거는 다시 시작되었다.

어느 날 아내가 동물병원을 다녀오더니 훌쩍거렸다. 깜짝 놀라 물었더니 소중이가 심장이 좋지 않아 얼마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동안 친정어머니 모시듯 정성 들여 약을 먹여 왔으나 더 심해진 것 같다. ‘안락사 시키자’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으나 아내의 슬픔에 기름을 붓는 것 같아 삼켰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소중이가 고개를 돌리고 기침할 때면 마음이 짠했다. 그를 쳐다보며 쓰다듬어 주었더니 슬그머니 드러누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을 한없이 핥아 주었다. 이별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간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로병사의 과정은 비슷할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불편하고 귀찮게 생각하겠지만 의식하지 말고 너는 너대로 행복한 생을 누리거라.

 

안덕일 작가

계간 '신춘문예 수필 등단' 전직 공무원. 사진작가. 기행집 '사진가와 떠나는 머물고싶은 풍경'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