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母情) 

일찍이 플라톤은 인간 삶의 형태를 영혼적인 측면에서 에피투미아(Epithymia), 에로스(Eros), 아가페(Agape)적인 삶 등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에피투미아는 동물적인 삶, 즉 욕망을 말하는 것으로 자기 본위적이며, 에로스는 인간 본연의 삶 속의 사랑으로 이른바 네가 있으면 내가 있고, 내가 있으면 네가 있다는 식의 자타 공존적이며, 아가페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타자 본위적인 특성이 있는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래서 인간은 모름지기 에피투미아적인 삶에서 에로스적인 삶을 거쳐 아가페적인 삶으로의 지향을 추구하고 있다고 정의함으로써 영혼의 성장과 진리를 향한 열망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신적 영역의 고결한 사랑인 아가페는 인간의 삶 속에서는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래서 어버이날에 늘 애창되고 있는 우리 가곡 '어머니의 마음'에서도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고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어머니의 사랑은 너무 크고 넓어서 자식 된 처지에서는 평생을 통해 다 갚으려 해도 갚을 길이 없는 것 같다.

내 어머니의 자식 사랑 역시 남달랐다.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아버지를 도와 대농을 일궈내는 데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해오셨다. 6·25 전쟁 중에는 아버지는 늘 뒷산 방공호에서 숨어 지내셨기 때문에 군대에 간 두 아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들 4명과 며느리 1명을 어머니 홀로 건사하시면서 피난살이를 하셨다.

1·4 후퇴 때는 갑자기 인민군이 집에 들이닥쳐 어머니를 총살하려고 마당으로 나오라고 했을 때, 총살을 당하더라도 등에 업힌 아들만은 살릴 생각으로 포대 몇 겹을 몸에 칭칭 감은 상태로 나아갔다고 한다. 일촉즉발 상황에서 총살 현장에 군관이 나타나 “이 아주마니는 후발대 병력에 대한 식사 준비를 하게 하라우!”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다고 한다. 이때 어머니 등에 업힌 아이가 바로 나였다.

당시 어머니들이 대부분 다 그러했지만, 특히 우리 어머니는 살아가시면서 특정한 종교적인 믿음을 갖고 계신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에 전도하기 위해 목사님이 오시면 극진히 모시기를 기뻐하셨고, 스님이 대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면 집에 있는 곡식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을 선별하여 시주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그런가 하면 우리 집안의 제사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십여 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큰댁에서 합동으로 지냈는데, 그럴 때마다 큰집에 서운치 않게 이것저것 신경 써서 인편으로 보내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다. 그리고 사촌들과 조카들이 우리 집에 오면 언제나 정성껏 한 상 차려 맛있고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셨다. 이래저래 오가는 정이 많다 보니 친인척 간의 사이는 이를 데 없이 화목하였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아들들이 잘되기를 하늘에 빌고 비는 나날을 보내셨다. 특히 아들들이 큰일을 앞두고 있으면 뒤란에 정화수를 떠서 놓고 매일 새벽에 기도하기 시작하셔서 그 일의 결말을 보고 나서야 새벽기도를 거두셨다. 내가 중학교와 대학 시험을 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기도를 드리면서 흘리신 눈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못 한 불효막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를 지어오던 셋째 형님마저 출가를 시키고 나서 어머니는 홀로 일꾼을 데리고 그 많은 논밭을 경작 관리하셨으니 얼마나 근심과 노고가 크셨겠는가? 그것도 모르는 중학 3학년생인 형과 중학 1학년생인 나는 방학을 맞이하여 시골에 내려와 생활했는데 그날은 텃밭에 감자를 캐라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얼마쯤 하다가 너무 날씨가 더워 인근에 있는 소양강에 가서 멱을 감고 놀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새 어머니가 혼자 감자밭의 감자를 거의 다 캐가고 계신 것이 아닌가? 우리를 보시자마자 어머니는 뭐라고 야단을 치셨는데 이에 형이 잘못한 주제에 뭐라고 대꾸하니까 어머니는 어미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비 없는 호래자식이 되려고 한다면서 통곡하시다가 마침내 단단히 결심하신 듯 우리들을 보고 따라오라고 하더니만 앞서 가시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엄청나게 화가 나신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하기도 어렵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

그런데 어머니는 뒷산 밤나무 단지까지 오셔서 앞 들판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드리 밤나무 가지에 허리띠를 동여매고 목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넣고는 “너희들이 이 어미 말을 잘 듣지 않으니 나는 여기에 목매어 죽어야겠다”라면서 허리띠 구멍에 목을 넣으시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란 형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또 빌었다. 이에 어머니는 “앞으로는 이 어미 말을 잘 듣겠니?”라고 몇 번 다짐을 받으신 다음에야 허리띠를 거두셨고 이내 두 형제를 껴안으시고 한참을 또 우셨다.

당시에 우리는 어머니가 평소 우리 어머니답지 않게 왜 그렇게 설움과 노여움이 북받치셨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식들마저 다 떠난 터에 홀로 남으셔서 많은 농토를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을 크게 느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기에 더하여 그나마 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식들이 방학이라고 해서 시골에 내려왔는데, 일손을 덜어주기는커녕 놀기에 바쁘다 보니 주변에 곡식은 익어 가는데 풀은 무성하고, 거둬들여야 할 곡식은 많은데 그대로 널려져 있다시피 하니, 그동안 그렇게 살아오지 않으셨던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가셨겠는가? 어찌 보면 가세가 기울어 가는 모습 자체를 현장에서 눈물을 삼키며 보시고 있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나는 전방의 임진강 지역에서 소대장 생활을 하다가 휴가를 나와 주로 춘천 집에서 지냈다. 대부분의 장병이 전방에서 근무하다가 오래간만에 첫 휴가를 나오면 서울을 거치게 마련인데 눈앞에 펼쳐진 서울 야경을 보는 순간 세상이 천지개벽을 한 듯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럴 때면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는 느낌과 더불어 그동안 격리된 생활을 해왔다는 소외감과 국방 의무에 대한 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 등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지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런 생각과 함께 휴가 기간을 후회 없이 보낼 요량으로 학교 동창 등을 만나 바쁘게 돌아치다 보니 온전히 어머니와 함께하지를 못했다.그러다 보니 휴가 마지막 날 어머니가 오죽하면 “용섭아! 오늘은 나하고 저녁밥을 먹고 내 방에서 하룻밤 같이 자자꾸나”라고 하셨겠는가?

그러고 나서 내가 부대 복귀를 한 이후에 얼마 안 되어 어머니는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지금도 후회막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 바로 위의 형은 학군장교로 임관하여 12사단 사령부 경리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터라 전방 소대장보다는 훨씬 활동의 자유가 있다 보니 가끔 춘천에 들러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보신탕을 사 드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었다. 나도 언젠가는 어머니를 근사한 식당에 모셔서 극진한 대접을 해드려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이를 끝내 실천하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스러웠다.

때로는 막내로 태어나지 않고 장남으로 태어났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다 부질없는 짓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얕은 꾀일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허망하기까지 했다.

어머니를 여읜 지 벌써 50여 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한없이 용솟음친다. 인간 최고의 숭고한 사랑인 아가페적 희생을 통하여 자식이 잘되기만을 빌고 또 빌었던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사랑은 강물처럼 조용히 흐르지만, 그 물살은 깊고 끝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죽는 날까지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새기면서 어머니가 그렇게 빌고 빌었던 아들로 다시 태어나 잘 살아가겠습니다.

 

정용섭 작가.
정용섭 작가.

월간 『문학세계』 수필 등단. 보국훈장 천수장, 대통령표창(2회) 수상. 국방일보 편집위원, 강원성우회 편찬위원 역임. 저서 『북한의 선군정치에 관한 연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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