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실 부국장.
                              이형실 부국장.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사람을 필요할 때 쓰고 쓰임을 다하면 가차 없이 내친다’는 뜻이다. 중국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이 말은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패권을 다투던 춘추전국시대에 한신이라는 전략가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토사구팽의 장본인이다.

원래 한신은 초나라 사람이지만 한나라 유방의 대장군으로 발탁돼 뛰어난 전략으로 위·조·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유방을 패자로 군림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 후 한신은 유방의 허락도 없이 제나라 가왕이 돼 통치에 나섰다. 이것이 유방을 불쾌하게 한 단초였다. 그러나 유방은 한신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숨긴 채 참모의 조언에 따라 한신을 제나라 왕에 책봉해주고 자신의 숙적인 초의 항우를 칠 것을 주문한다.  

마침내 한신의 공격으로 해하에서 좌·우·앞·뒤 사면으로 포위된 항우 진영은 군량미가 바닥을 보이는 등 사기가 떨어지자 이 기회를 포착한 한신은 부하들에게 초나라의 노래를 가르치고 부르게 했다. 이 노래를 들은 초나라의 병사들은 향수에 젖어 군영을 이탈하는 등 전투태세를 상실해 결국 항우는 오강에서 자결, 초나라는 멸망하게 이른다. 이때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의미인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고사성어가 생겨났으며 사방으로 포위된 고립무원 상태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때 이 고사성어가 인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한신의 전략으로 천하를 손아귀에 쥔 유방은 한나라 고조로 즉위하고 한신을 제나라 왕에서 초나라 왕으로 임명하는데 이것이 한신에게는 화근이었다. 초나라 왕으로 부임한 한신은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는데 이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이렇듯 한신의 승승장구는 유방을 두렵게 했다.

천하를 호령하는 위치에 있는 유방이지만 막강한 군사력과 지략을 지닌 한신의 존재가 두려웠고 이러한 왕의 불편함을 눈치챈 신하의 간계가 한신의 목을 죄어왔다. 결국 한신은 초나라 왕으로 임명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반란죄로 체포돼 삼족을 멸하는 형을 받게 이른다.

이때 죽음을 앞둔 한신은 ‘교활한 토끼를 잡으면 달리던 사냥개는 삶아 버리고(狡兎死走狗烹) 적을 멸하고 나면 충신은 죽임을 당한다더니 천하가 평정되자마자 내가 잡혀 죽는구나’하고 비분강개했다는데 이때 나온 고사성어가 토사구팽이다.

지난 2018년 7월2일, 구리시 제16대 시장으로 취임한 안승남 시장은 취임식장에서 이례적이며 파격적인 의례를 단행했다. 정치적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호언한 것을 약속이라도 하듯 취임식장 단상에 박영순 전 시장을 앉혔다. 그리고 “중단됐던 토평벌에 구리월드디자인시티 사업을 재추진하겠다”고 취임사를 통해 약속했다.

왜 그토록 안 시장은 박 전 시장을 각별하게 떠받들었을까. 이야기는 2018년 6·13 지방선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방선거를 앞둔 지역 정가엔 더불어민주당의 인기 못지않게 박영순 전 시장의 입김 또한 상당했다. 박 전 시장은 비록 선거법 위반으로 6기 후반을 남겨두고 직을 잃었으나 정치적 역량만은 여전했다. 그가 누군가. 관선 시장을 거쳐 2기 4기·5기·6기 전반 민선 등 무려 십여 년 동안 시장직을 맡으며 지역의 핫이슈인 GWDC를 이끌어 온 산증인 아닌가. 당연히 정치에 뜻을 둔 후보자들은 이런 캐리어를 가진 박 전 시장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6·13 시장선거를 앞두고 경선에 나설 민주당 후보군은 정치권 줄 대기 등 물밑 작업이 치열했다. 경선 승리가 바로 7기 시장으로 이어지는 꽃길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역 정가는 군웅할거였다. 후보군 중에 눈에 띈 후보는 안승남 도의원이었다. 그는 눈치 빠른 판단으로 박 전 시장의 마음을 훔친 것이다. 자신이 도의원 시절, 박 전 시장이 추진하던 GWDC사업을 경기연정 1호로 만드는 등 열의를 보였고 그 열의가 박 전 시장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안 후보의 경선 히든카드는 박 전 시장이었고 결국 뜻을 이루게 됐다. 당시 경선은 안승남 후보보다 시 의장을 지낸 후보가 유리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경선 결과 일반당원표에서 뒤지던 안 후보가 권리당원표에서 역전해 0.8-1.2% 근소한 차이로 안 후보가 승리했다. 박 전 시장의 선택이 ‘신의 한 수’였던 것. 

시장 후보가 된 안 후보는 자신의 공약집을 통해 “GWDC사업 살리기를 제1번 공약사업으로 천명, 이 사업의 산증인인 박영순 전 시장이 사업을 책임지고 완수할 수 있도록 뒷받침, GWDC사업추진 지원조례 제정, 윤호중 의원과 함께 이 사업이 문재인 정부 역점사업으로 책정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보은 공약했다.

제7기 시장에 당선된 후는 어떠했는가. 취임하자마자 박 전 시장은 ‘GWDC 국내자문위원회 특별보좌역 겸 특별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박 전 시장을 미국에 출장 보내기도 했으며 자신도 미국 출장에 오르는 등 박 전 시장 뜻에 부응했다. 심지어 안 시장은 기자들과 만남 자리에서 자신이 "박 전 시장의 아바타라고 불리는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술회하기도 해 박 전 시장에 대한 무한한 고마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박 전 시장을 향한 안 시장의 결초보은 유효기간은 채 1년도 가지 않았다. 약속했던 공약은 공약일 뿐 GWDC사업에 대한 동상이몽과 잡음이 일기 시작됐다. 급기야 지난해 말, 박 전 시장에게 위촉했던 특별자문위원직도 거둬들였다. 안면몰수 하겠다는 뜻으로 파악되는 이 조치로 안 시장은 결국 루비콘강을 건너는 쪽을 채택하고 말았다. 이러한 안 시장의 행동에 대해 주위에선 배은망덕(背恩忘德), 견리망의(見利忘義) 혹은 간명범의(干名犯義)라는 사자성어를 제시한다. 그리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의 표본이라고도 한다.

지난 8일 시민운동가로 변신한 박 전 시장은 성명서를 통해 "GWDC사업 추진의 전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행정 절차를 갖가지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있으며 시의회 등에서 이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사실을 위증, 왜곡하고 심지어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심한 불쾌감과 함께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리 멀지 않았던 기근의 시절, 배움이 적고 늘 가난과 고된 삶을 살았던 우리네 부모들은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고 세상살이가 퍽퍽해도 인간관계를 중시했다. 행여 친구들과 다툼 끝에 모진 말을 해도, 누군가를 의심해도, 불쌍한 사람을 지나치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나무라셨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하지 못했을 때 듣는 말 그 말은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였다. 작금의 구리시 전, 현 시장 간의 씁쓸한 사례를 접하고 김철현 시인의 시를 인용해 보며 이 글을 마친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어려울 때 동행해 준/정이 있는데/나 좀 살만하다고/그 정을 매몰차게 내버린다면/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서로 의지하여 쌓아 올린 신의를/헌신짝 버리듯 팽개친다면/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살다 보면 할 수 있는 것이/실수라지만/내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근본도 없이/다 남의 탓으로 돌린다면/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목숨까지 내놓는/맹세는 못 할지라도/인생에 부끄럽지 않은/의리란 있는 법/내가 먼저 배신하는 못난 짓/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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