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고백이지만, 필자도 청소년기 이전에는 금수저로 행세했다. 힘 좋고 인심까지 후했던 아버님은 소 장사를 하셨다. 밥상에 됫병 소주와 고깃국은 기본이었고, 소고기 장조림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 친구들 보란 듯이 잘게 찢어먹으며 손가락까지 쪽쪽 맛있게 빨았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거구의 아버님께서 맥없이 쓰러져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탓에 고기는 엄두도 못 냈다. 고등학교 마지막 여름방학, 내 손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즐겨 먹던 소고기를 사겠다는 옹골찬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당시 유행하던 선배의 가발을 빌려 쓰고 계성제지 신축 공사장으로 막일을 나갔다. (필자의 모교는 고3 졸업 때까지 빡빡머리였고, 새장터 우시장 도로변에는 가발공장 건물이 폐허가 된 채로 남아있다.)

황소처럼 느릿한 걸음걸이로 작업반장 앞에서 다리까지 흔들었다. 한두 번 이런 일 나온 게 아니란 걸 과시하려고 있는 개폼은 다잡았다. 몇 사람은 퇴짜 맞고 집으로 되돌아갔지만, 당당히 통과돼 못을 뽑는 빠루(노루발장도리)를 난생처음으로 손에 잡았다. 옆 사람의 작업 동작을 곁눈질하며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널빤지에 박힌 못을 뽑았다. 일과가 끝난 후 ‘눈썰미가 있네, 내일도 나와라’라는 작업반장의 말에 최대한 목소리를 굵게 깔아 대답하고는 쏜살같이 집으로 튀어 우물가에서 가발을 벗었다. (거짓말 조금 더 보태 온종일 흘린 비지땀을 우물가 연못에 모았다면 흘러넘쳤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였다.)

아버님 병환이 점점 위중해져 돈이 될 전답을 팔아 서문 밖 화교 침쟁이에게 바쳤다. 필자도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해 공군에 자원입대를 위한 신체검사까지 마쳐 입영날짜가 잡혔었다. 교내도서관에서 10교시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단테의 ‘신곡’을 비롯해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헤르만 헤세 등 수준이 높다는 서양 책은 모조리 서가에서 빼내 읽었다. 기차 통학을 함께하는 여고생들에게 진학을 포기한 걸 숨기려는 일종의 위장전술이기도 했다. 가방이 낡아 뚜껑의 회색 고무가 썩은 소고기처럼 너덜거렸다. 그걸 가리는 방편으로 도서관에서 빌린 두툼한 책을 가운데에 끼웠다. (학교신문 1면에 ‘기차’라는 장시를 교장 선생님 축사 옆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통학생들에게는 명색이 시인인데,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글쓰기는 물론 역도와 유도, 웅변, 그림 그리기, 자유교양경시대회 등 상장을 준다면 무조건 출전했다. 어머님은 상을 타오는 날이면 대청에 번철을 걸어 구수한 부침개를 부치시며 술상까지 챙기셨다. 아버님께서도 불편한 몸으로 상장 뒷면의 네 구석에 쌀밥 덩어리 두 알씩 얹어 안방 아랫목 벽에 꾹꾹 으깨 붙이시고는 ‘삼베길쌈 걸머메고∼’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시조창 한가락을 뽑으셨다. 두 분이 몇 순배의 약주가 돌고 돌아 어머님 차례가 되면 어김없이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며 이미자 뺨치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받아넘기셨다. (어머니께서는 노래도 농사짓듯 완전히 몰입된 상태에서 한 자락도 허투루 하시지 않으셨다.)

초겨울부터 세상은 싸늘하다. 엊그제는 충청도 바닷가 쪽을 무작정 쏘다녔다. 젓갈 내 물씬 나는 광천역사를 빠져나오는데 J 형의 ‘찔레꽃 노래비’가 얼른 오라며 반긴다. 막사발 굽던 K도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J 형도 몇 번 방송을 타면서 어느 날 갑자기 유명세를 타면서 예전처럼 쉽게 만날 수가 없다. 이따금 방송에 나와 멋지게 늙은 J 형이 ‘동백 아가씨’를 열창할 때, 하얀 두루마기 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아버님 옛 모습도 눈에 밟힌다.

그나저나 필자도 잡것들에게 단단히 홀렸던 모양이다. 엉뚱한 곳에 정력을 왈칵 쏟았더니 맥이 확 풀렸다. 흥분도 잘해 발끈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국민성을 잘 아는 윗선에서는 더 중한 미제사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슬그머니 뒷전으로 빼돌렸다. 세상은 벌집을 발로 걷어찬 듯 왱왱거린다. 수능이 낼모레다. 책을 벗 삼아야 될 어린 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박ㄹ혜 퇴진’을 외친다. 나라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단 말인가. 3천 원어치 순대와 파란 쐬주로 혼술하며, J 형이 부르는 ‘동백 아가씨’ 동영상에 취해 자격지심으로 얼마나 울었던가, 빨간 동백 아저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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