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단것이 먹고 싶을 때는 철둑 밑에서 녹슨 쇠붙이를 캐 엿장수가 지나가면 바꿔먹었다. 전쟁 때의 격전지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 데나 불룩 솟은 데를 헤집으면 녹슨 쇠붙이가 무진장 나왔다. (참고로, 오산시 죽미령 1번 국도변에는 UN군 초전비와 기념관이 있다) 기차가 올 시간이 되면 커다란 대못에 침을 잔뜩 발라 철로 위에 올려놓았다. 기차가 지나간 뒤 납작해진 그것을 우물가 숫돌에 갈아 퍼렇게 날이 선 칼도 만들었다.

단백질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친구들과 논두렁에서 먹거리 개구리를 잡기 위해 쏘다녔다. 끝이 날카로운 철사를 대나무 속에 넣고 고무줄을 튕겨 쏘면 개구리 등허리에 찍혔다. 철길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만들었던 작은 칼로 개구리 뒷다리 두 개를 잘라내 구워 먹는 맛이란 제삿날 소고기가 부럽지 않았다. 잘려나간 개구리 뱃속에는 하루살이, 모기, 풍뎅이, 잠자리, 메뚜기, 방아깨비, 사마귀 등 별의별 것들을 다 게워낸다.

권력자층 중에 세간에 입방아가 자주 오르내리는 자들은 겉보기와는 딴판이다. 가만히 그 다문 입 모양을 보니 그때 잡아먹었던 개구리 입을 쏙 빼닮았다. 개구리라는 놈은 언제나 입을 꽉 다물고 있다. 먹이를 먹을 때 말고는 입을 닫고 있다. 갈라보나 마나 불룩한 뱃속에는 온갖 잡것들이 잔뜩 들어있을 게 불 보듯 뻔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부지깽이로 살짝만 쳐도 쭉쭉 뻗을 놈들이다. 큰 칼을 들고 머뭇거리는 새에 어디로 튈지 모른다.

필자도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 지역 정치에 맹렬하게 가담했던 때가 있었다. 정치는 마약이나 다름없다. 한 번 발을 담그면 그 맛에서 헤어날 수 없다. 월급이나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의리 하나로 정치하는 친구 사무실로 글방도 옮겨놓고 출퇴근했다. 그 당시 걱정이라고는 오직 ‘남북통일’ 하나뿐이라서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펜대만 굴리던 가운뎃손가락 첫 마디에 박힌 굳은살은 지금도 감각이 전혀 없다.

여의도에서 무슨 행사라도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면 초청을 받지 않았어도 당연히 참석해 사진을 찍었다. 와이셔츠 깃을 빳빳하게 풀 먹여 다림질하고 붉은 물방울무늬 넥타이 뽕도 큼직하게 맸다. 정신 나간 아빠의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아이들이 학비 얘기를 꺼내면 ‘네 엄마한테’ 하라면서 아내에게 떠넘겼지만, 이른바 표 장사하는 ‘왈왈이’ 앞에서는 식사가 끝나갈 즈음 식당 주인에게 신용카드까지 선뜻 내주고 마음껏 긁으라며 통이 큰 척했다.

필자의 고향은 남촌동 488번지다. 서울로 치자면 남산 주변쯤이다. 어른들은 동네에서 큰 인물이 못 나와 촌티 벗기는 글렀다며 혀를 끌끌 차셨다. 경부철도가 가로지르면서 시내와 가로막혔지만, 바로 철길 너머에 재래시장과 역전, 개천 너머로는 초·중·고·대학까지 그야말로 도시의 노른자위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문풍지가 덜렁거리던 우리 집, 우리 부모님은 사 남매 먹는 것, 입는 것 걱정 없이 무탈하게 잘만 키워내셨다.

대선이 바로 1년 코앞이다. 너도나도 나서는 개구리들이 어디로 튈지는 예측 불가하다. 대통령마저도 우습게 보이는 세상이라서 그런지 쥐나 새도 아우성친다. 급기야 퇴임을 앞둔 나잇살 드신 유엔사무총장은 물론 현직 도지사, 시장들도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는 상황이다. 며칠 전에는 정계를 은퇴했다던 이가 뜬금없이 하산해 복귀했다. 새로울 것도 없이 매양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개굴개굴 개구리 목청 좋게 밤새도록 노래한단들 별맛 없어 듣는 이가 아무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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