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저녁에는 온 가족이 모여 ‘우리말 겨루기’ 방송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본선에 올라온 출연자들이라서 실력도 대단하다. 잘 쓰면서도 떠오르지 않거나 잘못 알았던 우리말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우리도 함께 문제를 풀면서 생뚱맞은 답을 댈 때마다 무릎을 치며 아쉬워했다.

십자말풀이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끝나는 일. 대상을 잘못 파악하고 일을 그르치는 일’이라는 지문이 화면에 떴고, 세로로 3음절인 낱말이란다. 출연자 4명 모두가 이상하게 정답을 대지 못한다. 쉽지 않다. 우리도 긴가민가해서 입 다물고 정답을 기다렸는데, 팔순의 어머니께서 혀끝을 끌끌 차시면서 ‘나 원 세상에 참’ 하시더니 정답을 척 내놓으셨다.

“헛다리 잡고 삐악삐악, 닭다리 잡고 삐악삐악!”

너나없이 바쁘게 쪼개며 살다 보니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얼굴도 모르는 세상이다. 문명의 이기는 잘 활용하면 경제원칙에서처럼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도 얻는다. 컴퓨터에 익숙한 신세대가 주고받는 대화는 간결하게 줄인다. 긴말이 필요 없다는 소리다. 그렇게 된 걸 문제 삼아 꼬투리 잡고 흠집 내려 든다면 고리타분한 골동품으로 취급당하기에 십상이다.

마침 한글날이고 일요일이다. 모처럼 푹 쉬고 싶은데 늦잠이라도 자게 내버려 두는 세상도 아니다. 용비어천가식으로 쉽게 나갈까 하다가 개운한 맛이 덜해 접었다. 세상이 제대로 풀리지도 않고, 뱃속 편하게 쓸 처지와 상황도 아니다. ‘닭다리 잡고 삐악삐악’으로 잡았던 초안을 선배에게 보여줬다. ‘중뿔나게 나대봤자 말짱 헛일’이라며 단칼에 잘라 버려 방향을 틀었다.

필자가 청소년이던 시절에는 “하이루!, 방가! 방가!”라는 인사말이 유행했다. 그 이후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안습-눈물이 남’이 등장했고, 요즘에는 소리 나는 대로 ‘칭구-친구’, ‘조아-좋아’로 변했다. 이 정도는 필자의 어머니께서도 말썽을 피우면 ‘맴매’하셨고, ‘쉬-소변, 응가-용변’은 물론 ‘찌찌-쭈쭈’ 등은 눈치로 척척 알아챘다. 

요즘에는 한글의 자음 초성만 써 ‘수고’와 ‘축하’를 ‘ㅅㄱ’와 ‘ㅊㅋ’라고 줄이고 있다. 자음 중 ‘ㅇ, ㄷ, ㅎ, ㅋ, ㅊ’은 쓰는 개수에 따라 뜻도 다르다. ‘ㅋ’이 하나라면 어처구니없는 웃음, ‘ㅋㅋ’ 두 개는 웃긴다. ‘ㅋㅋㅋ’이 세 개일 때는 할 말 없음, 4개 이상의 ‘ㅋ’은 배꼽 잡고 웃을 정도이며, 울고 싶거나 화날 때는 모음을 써서 ‘ㅠㅠ, ㅡㅡ’하면 끝이다.

제 뜻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에게 쉽게 배울 28자의 한글을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날이다. 갑자기 비 온 뒤로 기온이 뚝 떨어져 긴 소매 옷으로 갈아입고 한글박물관에 다녀왔다. 글과 말이 없어 남의 나라 것을 빌려 쓰는 나라도 많다. 세종대왕도 이미 사회 정보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걸 아셨나 보다. 자판에서 ‘SNS’를 한글로 바꾸니 ‘눈’이 된다.

신세대들은 이상한 글로 소통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우리끼리 소통하는 데 특별한 좌석이 아니라면 외국어로 버무려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 것이 우리에게 좋은 법이다. 북한처럼 ‘아이스크림-얼음보숭이, 다이어트-몸까기’라든가 전구, 형광등, 샹들리에를 ‘불알, 긴 불알, 떼 불알’처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긴말 할 것 없다. 바른말 바른 소리로 시원하게 내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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