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숙 자전적 수필집 '진흙 속에 핀 꽃'

독일에서 귀국하는 김연숙 시인을 수원시외버스터미널 맞이방에서 만난 지난 18일 오후 3시. 서로 초면인지라 필자는 기자 티를 내며 붉은색 체크무늬 남방을 걸치고 취재 가방과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약속장소에 갔다. 첫인상부터 시인다운 기운이 확 풍긴다. 긴 생머리에 치렁치렁 울긋불긋한 의상과 목에 두른 스카프 그리고 테가 낡은 모자까지 완벽한 옛 시인의 모습으로 김 시인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뷰 내용을 꺼내기도 전에 가방을 뒤적거리며 이것저것 자료를 꺼내 창틀 위에 올려놓는다. 비닐로 소중하게 포장된 자료도 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는 내내 단 한 번도 말을 더듬거리지 않고 우리말을 구사한다. 미국에 여행만 다녀와도 혓바닥이 꼬이는 사람들도 있는데, 46년이 지났음에도 너무 완벽한 한국인이다.

김연숙 시인에게 조영관 한국인 운동본부장이며, 신한금융그룹 부부장은 문학으로 이끈 스승이나 다름없다. 타국에서 향수병에 허덕일 때, 이메일로 고국에 대한 소식을 묻고 답하며 누이처럼 친구처럼 교감을 나누었던 사이다. 김 시인은 그분의 권유로 2011년에 서라벌문예 신인작품으로 등단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잊지 않으려고 틈틈이 썼던 그런 시들을 모아 2012년 10월에 첫 시집 『오늘의 기쁨』도 냈다. 이 자전적 수필집 '진흙 속에 핀 꽃'에는 어린 시절, 독일에서의 간호사 생활, 평생 동반자가 된 독일 남편과의 사랑 이야기, 뒤늦게 본 귀한 아들의 성장기, 18년 만에 방문했던 이야기 등 구구절절 삶의 애환과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는 문경군청 보건소에서 근무했던 김 시인은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과감하게 독일행을 선택했다. 3년 6개월간 예금했던 적금은 식구들이 살던 사글세 집을 전세로 돌려놓았다. 안양에 살던 큰오빠에게 빌린 10만 원으로 한복 두 벌과 한독사전 한 권만 가방에 넣고 독일로 가 간호사로 일했다. 우리나라 경제 기적의 첫 주역들은 누가 뭐라 해도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다. 언어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어 사전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익혔다. 3년이 지날 무렵, 당시 치과대학생이던 지금 남편의 프러포즈를 받아 1973년 3월 약혼, 1976년 1월에 결혼했으나, 5년 뒤인 1981년 1월에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치과대학을 졸업한 남편이 인턴 2년을 채우고, 드디어 1977년 개인병원을 개업했다. 김 시인도 32년간 남편을 도와 함께 일했다. 2010년 병원 문을 닫은 남편은 젊은 시절부터 꿈꾸었던 음악을 하며 여생을 즐기고 있다. 아버지의 끼를 그대로 이어받은 아들도 베를린에서 음악 활동 중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일 년에 서너 차례 무대에 함께 올라 연주한다. 김 시인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생겼다. 베를린 공대 도시계획과를 졸업한 똑똑한 며느리가 예쁜 손녀까지 낳아주어 그 재롱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단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게 없는 완벽한 백의의 천사가 된 셈이다.

김 시인은 지금은 독일인이지만, 1998년 아들과 함께 방문한 이후부터는 매년 봄가을 두 차례 6주씩 휴가를 내 방문했다. 이번에는 남편도 방문해 더욱 즐겁단다. 내일은 공항에서 남편을 만나야 해서 오늘은 판교에 있는 최 회장 댁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단다. 크고 작은 모임을 방문할 일정이 꽉 잡혔단다. 26일에는 오산시에서 사할린 교포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동강아 말해다오'라는 시를 낭송하고, 그다음에는 대전으로 내려가 오래도록 정을 나누었던 카페 정모에 참석한단다. 보면 볼수록 진흙 속에 핀 꽃은 신비하고 아름답다.

 

도서출판동행, 272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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