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 고향은 / 급행열차가 / 서지 않는 곳 // 친구야, // 놀러 오려거든 / 삼등 객차를 타고 오렴.

선생님의 <엽서>라는 이 작품은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을 보내주는 사람에게 혹은 간단한 안부편지에도 선생님은 이 시가 인쇄된 엽서를 쓰시죠.

휴일이라서 뒤죽박죽된 서고를 정리하다 보니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엽서가 여기저기 책갈피마다 끼워져 있네요. 며칠 전 모임에 선생님께서 건강을 회복하셔서 나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음에도 안양으로 올라가지 못했어요. 선생님께서 아시다시피 신문사 일이라는 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직업이 아니잖아요. 다행히 후배들이 시키지 않았어도 선생님께 꽃다발을 안겨드리는 소식도 카톡을 통해 봤답니다.

세월 참 빠르네요. 선생님 문하에 들어간 게 1981년 봄 이맘때쯤이니, 벌써 36년이 넘었네요. 선거가 끝나고 나니 거리가 조용하네요. 조용하다는 말이 시끄럽지 않다는 말은 아니고요,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안 들으니 조용해진 것이지요, 요즘 날씨가 예전의 봄날 혹은 초여름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푸른 하늘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제가 처음 선생님을 뵈었을 때나 지금이나 체크무늬 와이셔츠에 역시 빨간빛 넥타이는 변함이 없네요.

제 인생의 진로가 선생님 때문에 바뀐 건 분명합니다. 40여 년 전, 철없던 그때는 강의가 끝난 후 술 먹는 맛에 참여했었지요. ‘글로 문학이 되고 술이 시가 되던 시절’에 ‘글로 돈 벌겠다’라면서 ‘글로벌’ 외치며 허세까지 떨었지요. 누가 뭐라 하든 말든 하고 싶은 것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으니 선생님께 꾸지람 듣는 것도 당연했지요.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향토적인 것을 몰랐을 때였으니까요.

‘시인’ 외에 선생님은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도 않지요. 이미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집 ‘영의 유형’을 내셨고, 스승 조병화 시인과의 편지글 ‘시인의 편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아포리즘 ‘사랑의 팡세’ 등은 문학청년들의 로망이었지요. 안양문인협회 외에는 중앙문단에 나가 자리다툼을 멀리하시며 오로지 자신의 작품으로만 화두를 던지셨죠. 50여 권이 넘는 저서는 물론 안양에는 노랫말, 헌시, 축사, 비문 등이 곳곳에 남아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규모가 크건 작건 강의 때마다 최선을 다해 한 가지라도 더 지식을 전달하시려 하셨죠. 늘 ‘시보다 사람’을 강조하시며 낯설기 마련인 프로스트,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을 친근하게 데려와 주십니다. 제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지만, 선생님께서는 단 한 번도 모임에 빠지신 적이 없으셨죠.

저도 환갑을 넘겼지만, 아직도 저는 선생님 곁에서 아희처럼 굴고 싶어요. 말썽도 부리고 그러다가 선생님께 꿀밤도 맞고 싶고요. 요즘 선생님께서 편찮으시긴 하지만 저희 눈에는 변함없이 열혈청년으로만 비친답니다.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어도 그런 맘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이유를 저도 알 수 없어요.

저희 또래가 1대 제자들인데, 다들 못 나서 죄송합니다. 많은 제자에게 시 사랑을 나눠주시느라 기력이 쇠해지신 게 아닌가 싶어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글밥’ 먹는 제자들도 참 많아졌습니다. 선생님은 늘 제게는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아직도 선생님 앞에서는 어린애들인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건강이 좋아지시어 오래도록 지켜보아 주시고 또 조금만 더 이끌어주십시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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