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울의 봄이 부활했다. 엊그제는 봄비도 촉촉이 내렸다. 오랜만에 주말여행을 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기왕이면 서울부터 시작하자며 고집을 피웠던 필자였다. 그런데 팝콘처럼 다닥다닥 매달려 있어야 마땅할 벚꽃들이 서울에 오니 온데간데없다. 마치 언제 꽃이 피기라도 했느냐는 듯 시치미 뚝 떼는 나무들이 원망스럽다. 설마 했는데, 어느 틈에 꽃잎이 다 떨어지다니 낭패다. 이름이 백조라서 하얀 꽃이 핀 배경으로 예쁜 사진을 찍어주겠다던 야심 찬 어젯밤의 꿈은 물거품이 돼 사라질 판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인사동으로 갔다. 좁은 길이 아닌데 사람들로 꽉 찼다. 백조를 돌아서게 해 사진을 찍었다. 화사한 옷차림의 사람들도 꽃잎처럼 환하게 박혔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시간이라서 배가 고팠다. 아까부터 굶주림에 항의하는 회충들이 뱃속에서 요동치며 아무거라도 좋으니 좀 넣어달라며 야단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민생고부터 해결해야 할 판이다. 필자는 최대로 불쌍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백조에게 하소연했다.

“배고프다.”

난 단식투쟁 때도 밥은 먹었고, 찬밥 된밥 안 가린다며 구시렁댔더니, 부리나케 먹자골목으로 앞장서 쏙 들어간다. 이곳저곳 기웃거렸지만, 입맛을 확 당길 메뉴가 없다. 일단은 밖으로 다시 빠져나왔다. 길거리 포장마차가 눈에 들어온다. 간단하게 와플(?) 했더니, 눈을 살짝 흘기며 애들도 아니고…. 앗! 오랜만에 둘이 먹는 외식이다. 그럴싸한 데서 젊잖게 분위기 잡아야지…. 그때, 번쩍 ‘손으로 빚는’ 만둣집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집은 발로 만드나? 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가던 날이 장날이다. 바글바글한 사람들로 앉을 좌석이 하나도 없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난 자리라는 게 벽을 보고 앉아야 했다. 진짜 아니꼬울 정도의 만두 몇 덩이, 간에 기별도 안 갔지만, 배부르고 맛있는 체하며 요기를 끝났다.

오랜만에 다시 온 서울대병원 앞이다. 필자의 모교가 바로 맞은편에 있다. 수십 년 전 졸업사진을 찍었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아마도 교정에는 분명히 꽃이 남아있겠지 하며 길을 건너려 하는데, 무표정한 경찰들이 방패를 내리고 양옆 길을 꽉 막았다. 그랬구나. 내일이 4월 16일이구나. 벌써 3년이 지났구나. 그래서 잊지 말자며 대학생들이 깃발을 높이 흔들고 있구나. 우리는 경찰들의 눈치를 살피며 깃발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미처 꽃봉오리를 펼치지 못했던 애처로운 어린 넋들이 깃발에 매달려 아우성치는 모습이 배경으로 묻어나온다.

다음 목적지는 야시장이다. 또 걸어가잖다. 필자는 장딴지가 아파 다리를 질질 끌며 힘들어 죽겠는데 백조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잘도 걸어간다. 마침 행사를 끝낸 학생들도 금세 뒤따라와 거리를 행진 중이다. 길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은 짓밟혀도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 / 립스틱 짙게 바르고 / 사랑이란 길지가 않더라 / 영원하지도 않더라’

손수레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폐지를 잔뜩 싣고 세상사 단맛 쓴맛 다 본 어르신이 노랫소리에 맞춰 비탈길을 올라가신다. ‘사랑’을 ‘정권’으로 바꾸니 그럴싸하게 들어맞는다. 제발 이번만큼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 속절없는 사랑’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살이는 날이 갈수록 만만치 않다. 없는 사람들은 꽃피는 봄이 와도 한겨울이다. 요즘 입술에 ‘립스틱’ 짙게 바른 대통령 후보자들이 북 치고 장구 치며 제 잘났다 뽐내고 있다. 나팔꽃처럼 벌어진 입술에서 나오는 말마다 번지르르하고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뿐이다. 이번만큼은 안전한 대국민국, 안전한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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