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일찌감치 지원 입대해서 사회로 따진다면 선배들과 군대에서는 동기생으로 보냈다. 특기도 유별나 다른 보직보다는 직무교육 기간이 긴 탓에 자대로 배치될 때는 이미 일등병 계급장을 달았다. 익숙하지 않은 내무반 생활, 어리벙벙해서 바닥 청소용 걸레를 잡으니 이등병 후배가 깜짝 놀라 잽싸게 달려와 자기가 하겠다면서 밀쳐냈다.

내무반 입구에서 불침번도 섰다. 혈기왕성했던 시절이라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보초만 서는 게 아니라 선배 기수의 전투화도 광을 내야 했다. 기상나팔이 울리면 선임들은 자신의 전투화부터 확인한다. 구두코에 대고 여드름을 짜낼 정도로 반들거려야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션찮으면 아침 점호 때부터 정강이가 시퍼렇게 멍이 드는 수난을 당한다.

그때만 해도 구타는 빠질 수 없는 연중무휴의 일일 행사였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선임에게 얻어맞으면 당연히 화풀이는 밑으로 내려가게 마련이다. 저녁에는 허벅지가 빨래판처럼 오톨도톨해져야 맘 편히 잠자리에 들었다. 겨울이 되면 해가 짧아 내무반 생활도 훨씬 길어진다. 특히 12월 중순을 지나 크리스마스 무렵인 연말이 되면 군기를 잡는 얼차려의 강도도 높아졌다.

필자가 새내기 때는 선배 기수가 많아 고생깨나 했으나, 말년에는 제대를 100일이나 앞두고 일찌감치 열외 병장이 됐다. 고교야구 4번 타자 출신의 맹 상병이 내무반을 통솔할 때였다. 사법고시에 몇 차례 불합격해 뒤늦게 입대한 20대 후반의 석 병장의 심통이 단단히 뻗쳤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대원들을 2열 횡대로 복도로 집합시키더니 복부를 한방씩 내지르면서, 맹 상병을 향해 평소 때와는 다른 말투로 일갈한다.

“18, 동짓날 긴긴밤에 죽고 싶어 호흡조절들 하냐?”

대원들은 휴일이라서 기타 반주에 맞춰 유행가를 불렀다. 음치로 소문난 석 병장은 그게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맹 상병은 늘 옆에 끼고 있던 야구 방망이를 바닥에 몇 차례 콩콩 찧더니 바로 아래 기수 너더댓 명의 엉덩이에 분필로 하얀 줄을 찍 긋고는 방망이를 휘둘러 흔적 없이 가루를 털어냈다. 이런 일이야 한두 번 본 게 아니라서, 필자는 두 살 많은 맹 상병을 불러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며 명령했다.

“아가들은 살살 다뤄라.”

필자의 당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마치 초상이라도 난 듯한 울부짖음이 내무반을 뒤흔들었다. 결국, 일이 터졌다. 안개 낀 날이면 보이지도 않을 새내기들끼리 야구 방망이를 잘못 휘둘러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이다. 황급히 들것에 실어 의무실로 이동시켰다. 보안대에서 진상을 파악을 위해 나올 게 뻔하다. 마침 하늘이 도왔다. 당직 의무관이 필자의 고향 선배 최 중위였다. 특별히 보안을 부탁한 후 내무반으로 되돌아왔다. 몇몇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화장실을 드나든다. 대원들을 식당으로 보내자니 금방 눈치챌 것 같았다.

취사반에 점심 메뉴를 물으니 동짓날이라서 팥죽을 쑤었단다. 석 병장, 맹 상병을 비롯한 선임들과 의논 끝에 점심은 회식 겸 단합대회로 내무반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새내기들에게는 누가 묻든 간에 구타는 ‘절대 없었다’는 각본으로 입을 맞추었다. 대원들은 언제 맞기라도 했느냐는 듯 히히거리며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와 기름기 번지르르한 겉절이, 말랑한 새알심을 오물거리면서 두세 그릇씩 퍼먹었다. 제대 말년에 직무 유기로 영창 신세 질 뻔했지만, 액땜이 되었던 동지팥죽. 남자의 군대 이야기야 8할이 허풍이라지만, 이건 진짜 실화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래도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쯤에서 그만 읽으셔도 섭섭하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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