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이 은행에서 쫓겨나고 있다. 은행들이 일제히 가계 대출을 축소하면서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저소득층이나 저신용자들이 제2금융권 등으로 내몰리고 있다. 가계 부채가 1천조원 규모로 불어난 가운데 부채의 질까지 급격하게 나빠지면 중산층은 빈곤층으로 추락하게 된다. 원리금 상환 부담으로 가계의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면 내수는 더 부진해지고, 사회통합은 더 어려워진다. 박근혜 정부가 줄기차게 민생경제 회생을 강조하는 가운데 은행들은 가계 대출을 줄이고 있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현재 카드사 등의 판매신용을 뺀 전체 가계 대출(967조5천536억원) 중 은행 대출(481조2천805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49.7%였다. 은행 대출 비중이 50% 아래로 떨어진 것은 한은이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2002년 이래 처음이다. 통계가 시작된 2002년 말 은행 대출은 53.3%였다. 이후 집값 상승과 함께 은행들이 부동산 담보 대출을 확대하면서 2006년 말 60.1%까지 치솟았다. 그러다가 정부의 가계 부채 억제 정책이 시행되고,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에 나서면서 가계 대출에서 은행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축소됐다. 작년 말에는 간신히 50%대를 지키더니 올해 들어 결국 50% 아래로 떨어졌다. 은행에서 내몰린 가계는 더 높은 이자를 내는 2금융권이나 사채 시장을 찾게 된다. 문제는 비은행권의 이자율이 은행권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사채시장으로 내몰리면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고, 결국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게 된다. 중앙은행이 아무리 금리를 내려도, 금리인하에 따른 경기부양 효과가 지지부진한 것은 서민들의 실질금리가 여전히 고금리인 탓도 있다. 

한국은 신용등급이 떨어지기는 쉽지만 올라가기는 매우 어려운 나라다. 어느 한 곳에서 연체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신용정보가 공유돼 모든 금융기관에서 신용등급이 떨어진다. 이자율은 급속도로 올라가고, 연체가 반복되면 퇴출된다. 은행이 이렇게 가계를 푸대접하고 있을 때 그 틈새를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 등이 뚫고 들어왔다. 저축은행은 급성장세를 누렸지만, 대다수가 대주주의 횡령과 불법대출 등으로 엄청난 부실을 남기고 파산하고 말았다. 서민금융을 도외시했던 은행들이 결국 저축은행을 인수해 부실을 떠안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최대 34%가 넘는 이자를 받는 대부업체들도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다. 1위 대부업체인 러시앤캐시는 연간 1조원 이상을 대출해서 1천억원이 넘는 이익을 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원캐싱', '미즈사랑' 등 군소 대부업체들을 인수하며 몸집을 불렸고, 최근에는 저축은행 인수에도 나섰다. 한국은 이미 일본계 자금에 뿌리를 둔 대부업체들의 천국이 됐다. TV만 틀면 온종일 고금리의 빚을 내라고 권하는 대부업체 광고가 나오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대부업체들의 TV광고를 심야로 제한하거나 아예 금지하라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지만 금융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다.

1천조원대로 불어난 가계 부채가 한국 경제 재도약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려면 가계의 소득을 증대시켜야 한다. 그러나 금융 당국은 가계 대출 축소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계의 부실이 은행 시스템으로 전이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가계 부채의 총량도 늘고 질도 나빠진다. 결국 가계도 어려워지고 은행도 부담이 커지는 악순환이 된다. 해결책은 오히려 정반대에서 찾을 수 있다. 은행에만 이롭게 돼 있는 신용평가시스템을 가계 중심으로 바꾸고, 적극적으로 신용을 평가해 은행의 가계 대출 비중을 적정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 가계와 은행의 건전성을 두루 살피는 창조적인 정책이 나와야 한국 경제의 재도약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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