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이력…교사·시인·기자 거쳐 박물관장에

"인천의 토박이 비율이 낮아 애향심이 부족하고 단결이 안 된다고들 하죠. 하지만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갖고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을 찾아온 이들로 넘치는 활력 있는 도시, 그곳이 바로 인천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천의 정체성을 설파하는 조우성(67)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시인·기자·교사를 거쳐 지난달에는 박물관장직을 맡게 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인천에서 태어난 조 관장은 인천고·한양대를 졸업하고 1973년 인천 광성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1975년에는 박목월 시인이 창간한 월간 시 전문지 '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대학 재학 시절 박목월 선생의 애제자이기도 했던 그는 국어교사로서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시를 쓰며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그러던 중 1987년 6월 항쟁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민주화 여파로 언론사 창간이 잇따르자 그는 교사직을 포기하고 1988년 인천일보 창간 멤버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세상에 시밖에 없는 줄만 알았던 그때 논리적이면서 명징한 인과관계에 따른 기사가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현상을 보며 운문뿐 아니라 산문의 힘도 대단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각계각층의 인물을 만나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작업은 즐거웠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인천은 일본강점기 때 3·1운동을 못한 부끄러운 도시"라고 주장한 인천 저명인사의 강연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기자로서 사실 여부를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휴일이면 정부문서보관소, 국가보훈처, 지방 박물관들을 돌며 관련 자료를 샅샅이 뒤져 탐독했다.

그 결과 1919년 3월 6일부터 4월 2일까지 인천 창영공립보통학교 학생 주도로 만세운동이 있었고, 계양구 황어장터에서도 대규모 만세운동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가 인천 향토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조 관장은 언론사에서 왕성하게 현장을 누비기 어려운 선임급 간부가 되자 사직서를 내고 1995년 다시 광성고교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했다.

그러면서도 쉬는 날이면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시내 고서점을 돌며 향토사 연구에 매진했다. 

인천의 숨겨진 역사 찾기에 바친 그의 노력은 '간추린 인천사'(1999), '20세기 인천문화생활연표'(2004), '인천이야기 100장면'(2004) 등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인천 향토사 관련 서적 출간으로 이어졌다. 

2008년 정년퇴직으로 교단을 떠난 조 관장은 이후에도 인천 시사편찬위원회, 남동구 2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인천 향토사 연구에 몰두했다.

향토사 연구를 위한 자료 검색을 위해 전국의 각종 박물관을 찾다 보니 박물관에 대한 조예도 깊어졌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자장면박물관, 인천개항박물관 건립 땐 자문위원 또는 건립추진위원으로 위촉돼 인천의 발자취를 담은 박물관들의 탄생을 도왔다.

인천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박물관들의 산파 역할을 한 조 관장은 지난달 공모를 거쳐 우리나라 첫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의 관장으로 부임했다.

조 관장은 인천시립박물관이 화석화된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시민사회 속에 찾아가는 박물관으로 특화시키는 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12일 밝혔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지역사회 후원금을 유물 구입비로 활용하는 세계 유명 박물관처럼 인천에서도 시립박물관 후원회를 구성해 시민의 참여를 더욱 높이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박물관은 집단기억의 보존창고이자 한 도시의 숨결·두뇌·심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천만이 할 수 있는 박물관, 인천시민의 삶에 더 가까운 특화된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제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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