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의사들 구국정신 후예들에 물려주자!!

● 공칠보 등 오산장날 300여명의 군중들 "독립만세"고창
● 일경에 체포되어 태형 90도를 받으면서도 항일운동 앞장
●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후유증 앓다 조국 광복 못보고 순국

공석윤(1939년 작고)씨는 일제강점기 시절 경기도 오산지역에서 3·1 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다. 자(字) 칠보(七甫)로 더욱 많이 알려진 그는 1919년 3월29일 오산 장날에 300여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6개월의 모진 고문을 받던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1939년 사망했다.

◇ 본    관 : 곡부(曲阜)
◇ 본    명 : 공석윤(孔錫允)
◇ 생존기간 : 1884.05.27.~1939.10.27.   
◇ 활동분야 : 독립운동  
◇ 출 생 지 : 경기 오산(烏山)  주요수상 : 대통령 표창(1995)추서

본관은 곡부(曲阜), 본명은 공석윤(孔錫允)이다. 자(字) 칠보(七甫)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경기도 오산사람으로 1884년(고종 21)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귀골이 장대하고, 성품 또한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그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라는 치욕적인 국가적 슬픔을 가슴에 품고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에 저항하여 왔다.

1919년 3월 1일, 벌어진 독립만세운동 이후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공칠보(孔七甫)는 수원군 성호면(현 오산시)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유진홍(兪鎭弘), 이성구(李成九), 김경도(金敬道), 정규환(鄭奎煥), 이규선(李圭璇), 김용준(金用準), 안낙순(安樂淳)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오산장날인 3월 29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등 준비를 진행시켜 갔다.

거사일에 이르러 공칠보는 오산장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런데 시위 도중에 공칠보, 안낙순, 유진홍등 주동자 7의사가 일경에 피체되자, 시위 군중들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오후 4시경 다시 모인 5백여 명의 시위군중은 공칠보등 7의사의 석방을 요구했고 이에 당황한 일경은 곧 7의사를 석방했으며, 석방된 공칠보는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면장 류진열에 대항하여 면사무소를 점령하고 우체국의 전화통을 파괴하여 수원으로부터 오는 일본군의 지원을 불가능하게 했으며, 인근의 일본인 주택 및 상점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밤늦게까지 주도했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년간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투옥하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일본경찰, 일본인 폭행 등으로 체포 및 석방을 반복하면서 요시찰에 걸려 인천으로 피신했다.

이후 일제에 당한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후유증을 앓다 간절히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1939년 10월 27일 고향땅인 오산을 등지고 인천 용현동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8월15일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 공칠보 의사의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의 당위성

1. 태형90도 외 미결 투옥기간이 다른 사건보다 현저히 길었다는 점.
[1919.03.29.체포 1919.11.06.판결 약 7개월 8일, 다른 사건들은 1~2개월만에 판결. (3.1운동실록 내용 서대문감옥 1년 투옥사실 기록됨.) 
현 관례 투옥기간 1년 이상 애족장, 10개월 이상 건국포장, 3개월 이상 대통령 표창, 태형90도 이상 대통령 표창 태형1도 하루 계산. 이성구, 이규선, 김경도, 정규환 의사 본형에 미결기간 합산 공칠보 의사 미결기간 미합산 하여 포상 국가기록원 공훈록에서 확인가능]
2.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전개, 경찰서 및 주재소 투옥 
(3.1운동 이후에도 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인 및 경찰 등 폭행으로 연루되어 태형 및 고문당함. 고문의 고초로 고향땅인 오산을 등지고 인천으로 피신 순국.  최초 인천 부평 가족공원 묘지 안장 1982년 경기 화성시 동탄면 신리 선영 안장) 
3.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1939.10.27.일제의 잔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
(現 법령 의거 순직군경 및 순직공무원을 관련 질병으로 사망 시 순직처리)
4. 이유홍 의사, 이두형 의사는 3.1운동으로 태형90도를 받으시고 불구자나 순국으로 애족장 수여, 문달환 의사, 이강인 의사, 임현주 의사, 조영선 의사 등 태형으로 대통령표창 이후 애족장으로 승격, 마지막으로 공칠보 의사 와 함께 3.1운동을 전개한 이성구 의사, 이규선 의사, 김경도 의사, 정규환 의사 등 모두 애족장 추서 그러므로 공칠보 의사의 애족장 추서는 당연하다 사료됨.

※ 3.1운동실록(이용락) 기록에 의하면 서대문감옥에 1년 투옥사실이 기록 되어 있는 만큼 애족장 추서는 당연하다고 사료됨. 
  고문에 의한 순국인정 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가능함.
 
- 대한민국 건국훈장 :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5등급으로 되어 있다. 건국훈장 아래의 훈격으로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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