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에 죽은 총각 사천강에 흑룡되어 원한을 품었으니~"

고려 말엽, 지금의 판문점부근 한 마을에 어여쁜 딸 하나를 둔 촌장이 살고 있었다.

촌장의 딸 옥화는 그 미모가 어찌나 고왔던지 인근 총각들이 보기만 하면 그만 첫눈에 홀딱 반하여 짝사랑에 가슴을 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옥화에게 참으로 딱한 일이 일어났다.

인근 동네에 기운이 황우같은 장사로 이름난 억쇠라는 총각이 물을 긷는 옥화의 모습을 보고 그만 첫눈에 반하여 짝사랑을 하다가 급기야는 상사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됐다.

얼마후 억쇠는 " 옥화한테 장가를 가고싶다" 는 말을 하자 그의 어머니는 “원 아무리 철이 없고 못 배운 자식이기로서니 그렇게 턱없는 소리를 할까.” 라고 하며 답답해했다.

어머니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꽃처럼 어여쁜 옥화와 자신의 아들인 억쇠와는 빗대어 보기도 미안했던 것이다.

억쇠는 급기야는 큰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옥화의 이름을 자꾸자꾸 부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다급한 판에 이르자 억쇠의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촌장에게 찾아가 백배사죄하고 사연을 말하니 촌장은 행여 소문이 날까 두렵다고 두 손을 내저으며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촌장에게 매달려 애원을 다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이렇게 억쇠는 짝사랑에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죽은지 며칠이 도지 않아서 이 판문점 마을에는 괴이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판문점과 덕현동을 양쪽에 두고 흘러 내려오는 사천강이 자꾸 범람하여 그 위에 놓인 판문교가 물에 떠내려간 것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도 새로 둑을 쌓고 다리를 놓아도 그 다음날로 억수같은 비는 둑을 무너뜨리고 다리를 삼켜버리곤 하였다.

하루는 견디다 못해 강둑을 살펴 보러 홀로 나갔더니, 강둑에 웬 여인이 소복을 곱게 입고 앉아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는게 아닌가! “사랑 사랑 짝사랑에 병들어 죽은 총각 사천강에 흑룡되어 원한을 품었으니 어이할꼬 그 아씨를 어이할꼬...” 촌장은 그 여인의 구슬픈 노랫가락을 듣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짝사랑에 병들어 죽은 총각이 사천강에 흑룡이 되어 원한을 품었다니 그것은 필시 자기 딸에게 반했던 억쇠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촌장은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여인 곁으로 다가가서 나직이 여인을 불렀다. 그랬더니 여인은 소름이 끼치도록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남기고는 바람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촌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나중에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촌장의 딸 옥화가 꿈을 꾸었는데 머리가 셋이나 달린 시커먼 용이 옥화 앞에 나타났다.

흑룡은 “이 다음에 새로 다리를 놓거든 정성들여 제사를 지낸 후 옥화 당신이 맨 처음 그 다리를 건너시오. 그럼 아버지도 일어나고 다시는 홍수가 안 나도록 내가 보살펴 주리다" 흑룡은 말을 마치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튿날 아침, 옥화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간밤의 꿈 이야기를 아버지께 했다. 촌장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참이라 옥화의 꿈대로 실행할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일렀다. 그랬더니 그날로 촌장의 병이 사라지고 사천강에 새로 다리를 놓게 되었다.

그날 제사가 끝나고 촌장의 딸 옥화가 새옷으로 갈아 입고 조심조심 다리를 건너가게 되었다.

다리 양쪽에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피리를 들고 꽹과리를 치며 옥화가 다리를 건너는 모양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옥화의 아버지 촌장도 희색이 만연하여 딸이 다리를 건너가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는데 옥화가 다리 중간에 막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마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일고 시커먼 먹구름이 일진광풍을 몰고와 세상은 일시에 어둠에 싸여 버렸다.

바로 그때 시커먼 머구름속에서 머리가 셋 달린 흑룡이 튀어나와 다리에 서 있는 옥화를 덥석 나꿔채 가지고는 쏜살같이 하늘로 올라가는게 아닌가! “옥화야! 옥화야!” 촌장이 두 발을 동동 구르며 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으나 옥화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도 못하고 어느새 구름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촌장은 그만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으나 마을 사람들이 업어다 치료하여 겨우 목숨만 건졌다.

흑룡이 옥화를 데리고 사라져 버린 다음, 하늘은 신통하게도 맑게 개이고 그후부터는 사천의 물이 나날이 줄어 홍수가 나기는커녕 갈수록 강폭이 좁아지더니 나중에는 잔잔한 냇물로 변하였다.

그 뒤에 놓인 다리도 떠내려가는 일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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