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 랑그에트 대표
정한아 랑그에튜 대표

◇2024년도 수능평가: 반전의 반전, 한편의 유주얼 서스펙트

반전(反轉) 영화의 대작,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영화가 있다. 5명의 용의자로부터 범인으로 지목된 카이저 소제를 찾기 위해, 형사 데이브 쿠얀은 절름발이 로저 버벌 킨트를 심문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가 범인을 확신했던 쿠얀은, 심문이 진행되며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을 지켜보던 관객들도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반전’의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가 범인이 아닌 것이 밝혀지며 경찰서에서 풀려나는 순간, 경찰서를 나서는 절름발이 버벌 킨트가 사실은 절름발이가 아니었으며 이 모든 것이 그가 계획했던 일이었고, 그가 바로 카이저 소제임이 드러나면서, 관객들은 처음에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는 ‘반전의 반전’이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며 영화가 끝이 난다.

이번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한편의 반전 영화와 같았다. 한마디로 예측 자체가 의미 없었던 사상 초유의 불안하고 당황스러운 시험이라 평한다. 시험을 불과 2개월 앞두고 비전문가인 정치가들이 소위 ‘킬러 유형 배제’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기존의 시험 유형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비틀어 놓고서, 막상 수능시험장에서는 사실상 “킬러 유형”에 가까운 문제를 다량 출제함으로써 다시 한번 그 예측가능성을 비틀어 놓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시험이 절대로 내가 생각한 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항변하기도 하고, ‘준킬러 유형’이 많이 출제된 것이지 ‘지금까지와 비슷한 형태의 킬러 유형’은 없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위 ‘킬러 유형’이라는 것이 정답률이 낮은 문제를 말하는 것이고, 실제 이번 수능에서 10%~20% 정답률에 불과한 어려운 문제가 꽤 많이 있었다는 것을 본다면, 그들의 항변은 사실상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시험이 내가 생각한 대로 출제되지 않는 것이 정설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생각한 대로’라는 말과 ‘내가 예측할 수 없는’이라는 말은 전혀 맥락이 다른 말이다. 시험은 최대한 ‘예측 가능한 영역’ 안에서 스스로가 공부한 노력과 재능으로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의 반전을 사용한 이번 수능을 정의하자면, 왜려 정반대로 ‘예측 불가능한 영역’ 안에서 내가 스스로 공부한 노력과 재능으로도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풀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의 항변은 결국 “공교육을 통해 모두 풀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겠다”라는 말을 사실상 거짓말로 만든다. 공교육을 통해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게 출제하여 기회를 공평하게 만들겠다는 취지일터인데, 그 원칙에서 한참을 벗어난 출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뻔한 이야기는 다들 할테니 여기서는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반전의 반전에 맞서는 방법: 전공이 아니라 직업군을 봐라

이제 수시지원은 어느 정도 종료되었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수능으로 수시지원의 최저등급을 맞추는 데 실패한 학생들은 모두 정시로 지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꾸었던 꿈과 희망보다는, 현실적으로 받은 성적표에 집중하여 전략을 짜야 한다. 

그렇지만 이때 다들 점수를 어떻게 계산하고 그래서 어떤 가산점을 받고 경쟁률이 어떻고 하는 확률 싸움에만 매몰되어 있다.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어떤 학교의 어떤 전공을 기준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보통의 고등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나 심지어 컨설팅 담당 선생님까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대학 시스템과 직업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대학별 입시통계와 점수에만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왜 그 전공을 하려는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전공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장 몇 개월이 아니라 10년 앞을 내다본다면 결국에는 어떤 직업군에 괜찮은 학벌로 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면, 지금 받은 점수로도 괜찮은 학교의 괜찮은 전공을 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이과 학생을 중심으로 예를 들어 보자.

반도체를 연구하고 싶은 학생이 전자공학과를 점수에 맞춰가려면 굉장히 높은 점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반도체 연구를 직업군으로 삼고 싶다고 해서 꼭 전자공학과로 대학을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조금 경쟁률이 낮은 전자과나 전기과로 지원하여 합격한다면 충분히 그 직종을 지망할 수 있다. 그런데도 합격선에서는 10점 이상이 나기 때문에, 전자공학을 지원하기에 애매한 학생이라면 같은 대학의 전자과나 전기과는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

게다가 반도체를 개발하는 연구원이 공학자만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반도체는 재료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고, 채굴도 중요하며, 화학도 중요하고, 심지어 전자기 신호나 AI 연구 분야에서는 생물학이나 심리학도 매우 중요한 계열이다.

쉽게 말하면 소위 취직이 잘된다는 첨단분야일수록 거의 모든 영역의 지식과 전공을 필요로 한다. 나아가 전공을 2개 이상 요구하는 곳도 많다. 그런데 90년대식의 생각을 기준으로 컴퓨터 할 사람은 무조건 컴퓨터공학과, 백신 개발할 사람은 무조건 생명공학과 이런 식으로 전공을 정하고 있으니, 해당 학과의 경쟁률만 치열한 상태다. 
소위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다. 당연히 점수가 되면 자기가 원하는 직업과 가장 적합도가 높은 전공을 하면 좋다. 그렇지만 점수가 되지 않는데도 굳이 고집하여 떨어지기보다는, 관련 전공으로 우회하여 지원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대학교 입학 이후 복수(다수)전공제를 이용하도록 하자. 예컨대 화학공학을 희망했으나 화학과로 점수를 낮춰 합격한 학생은 화학과와 화학공학을 충분히 함께 공부할 수 있다. 오히려 자연과학 이론과 공학 이론을 함께 배움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어차피 졸업하려면 교양과목의 학점을 채워야 하는 현실에서 그 일부를 다른 유사한 전공으로 채운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심지어 졸업장에도 그냥 화학과 졸업, 화학공학과 졸업으로 어떤 전공으로 입학했는지 알 수 없게 나온다.

쉽게 말하면 전기과를 나온 사람이 반도체를 연구하거나 화학과를 나온 사람이 화장품 개발을 하는 걸 사회에서는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오직 수험생과 그 수험생을 둘러싼 사람들만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졌다고 해서 짓밟히지 않는 입시가 되었으면

그래도 입시과정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어차피 합격자 수가 정해져 있는 경쟁이니까. 다만 우회할 수 있는 길들이 많고 그것은 당장 어떤 대학 무슨 전공을 했느냐는 ‘당신들만의 의미없는 자랑’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경쟁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요하다. 인간은 오직 자기보다 나은 인간을 상대로 싸우고 이기려 할 때만이 발전하고,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려고 욕심부릴 때만이 앞으로 나아간다. 남과의 비교와 경쟁은 처음부터 나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준 것은 바로 그 경쟁을 통한 성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은 승자와 패자라는 위계질서를 만든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고 피곤하다. 그렇지만 빈곤과 차별 같은 자본주의의 문제는 대부분 이 위계질서 자체에 있지 않다. 문제는 바로 그 위계질서가 지배적이고 영구적일 때 발생한다. 한번 승자가 된 사람이 영원한 승자가 되어 패자를 짓밟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령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갔다는 사실 자체가 왜 나쁜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18~19세에 좋은 대학을 갔다는 사실로 한평생 남의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살 수 있는 면죄부를 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쟁의 본질은 남을 이기는 것에 있지, 남의 위에 서는 데 있지는 않다는 소리다. 그러니 우리 또한 이러한 경쟁으로 돌아가서, “아무개 집의 아들딸은 어떤 대학 무슨 전공을 들어갔다더라”가 아니라, 10년~20년 뒤의 “내 직업이 무엇이었으면 좋겠다”에 초점을 맞추면 오히려 충분히 길이 열린다. 모두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 그것이 경쟁의 본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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