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인 칼럼] 텃밭(菜麻圃)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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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인 칼럼] 텃밭(菜麻圃)의 하루
  • 일간경기
  • 승인 2019.05.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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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인 편집위원

채마포는 채소나 밭작물을 기르는 밭이란 뜻이겠다. 요즘 말하는 텃밭이다. 우리 중부지방은 채마포 일이 4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감자와 땅콩을 시작으로 5월 초부터는 고추, 참깨, 옥수수, 오이, 호박 등 각종 야채가 농촌의 일손을 몰아친다. 밭작물 심기가 마무리 되는 시점이면 또한 가래질이며 써레질로 논농사도 시작된다. 지금처럼 기계화가 되기 전 어릴 적 시골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런 암소를 몰고 가시는 선친의 지게에는 쟁기가 얹혀 있었다. 지게고리에는 조그만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즐거운 음악을 뿜어내며 농사일의 고단함을 희석시키는 장면도 일품이었다. 내도 그 당시에는 항상 그 라디오를 들어가며 일하던 기억이 난다. 음악을 들으면 훨씬 지루함을 덜고 힘도 덜 드는 느낌이었다. 그 때는 한창 팝송을 배우기 시작하던 때라 지금도 생생하다. F. R. David의 words나 Nicole의 A Little Peace 등의 라디오 소리가 훌쩍 지나버린 추억갈피 속으로 가 버렸다. 그러나 밭고랑은 지금이나 40년 전이나 세월의 흔적이 없구나. 시설채소나 시설원예가 발달한 요즈음에도 시골 들판에 움직이는 농부들의 손에는 예전과 같은 호미나 뇌기가 들려져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 매한가지로 정겹다. 송아지 울음소리, 이랴! 이랴! 와! 와! 하는 쟁기질의 소 모는 소리는 트랙터 굉음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지난 어린이날에는 무척 바빴다. 언제부턴가 어린이가 없는 우리 집은 어린이날은 고추 심는 날로 정해져 내려오고 있다. 판매가 목적은 아니지만 5남매가 나눠 먹고, 하절기의 중요 채소인 풋고추와 김장용 고춧가루를 위해 필수로 심는 작물이다. 시골집치고 고추를 안 심는 집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작년 첫서리 전 수확한 풋고추로 만든 엄마표 고추튀각이 한 자루나 있다. 등산이나 야유회 갈 때 막걸리 안주로 필수 소지품 중 하나로 요긴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웃 선배가 트랙터로 로터리 쳐준 밭에 두럭을 치고 비닐을 덮고, 구멍을 뚫어 포기당 3백 원짜리 고추모를 심는다. 조루(稠漏)로 물을 주고 정성스레 흙으로 북을 주고는 쇠말뚝을 박아 놓는다. 가지가 늘어지면 줄을 띄우기 위한 작업이다. 이번에는 밭고랑에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비닐 천까지 덮어 버렸으니, 텃밭지기이신 팔순 노모의 근심을 한층 덜어주는 작업이었다. 그 다음엔 찰옥수수 한판을 심었다. 8×16=128포기를 물을 줘가며 정성스레 심었으니 올해는 옥수수 철에는 실컷 먹고도 남을 것이다. 이어서 실파모종을 심고, 호박모종 오이모종을 심었다. 뒷동산에 올라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 오이 넝쿨 지지대까지 만들어 놓으니, 그날 일과가 끝났다. 오후 한시까지 죽어라 바쁘게 움직였다. 온 몸이 땀범벅이 되었음은 물론이요, 금년 들어 처음으로 냉수로 샤워를 하는 시원함도 느껴 보았다. 3월 말에 뿌려 놓은 적상추들이 솎아달라고 아우성이다. 군데군데 한소쿠리 솎아서는 이웃집도 나눠주고, 된장을 발라 늦은 점심을 한입 가득 넣어 본다. 시내에서 동생이 사온 삼겹살에 반주 한 잔 곁들이니 그제야 전원생활의 낭만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나른한 오후다. 온 식구가 40여 년 전 그랬듯이 오전의 고된 일과에서 오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단체로 오수(午睡)에 빠져본다. 세종대왕의 이질(姨姪)이시며 당대 명성을 날리셨던 19대조 할아버님의 함자(銜字)가 희맹(希孟,1424-1483)이시다. 그 할아버님의 ‘농부의 집(田家)’이라는, 전원시로서 계절적으로 딱 맞는, 구절을 오수몽(午睡夢) 속에 그려본다.

(流水涓涓泥沒蹄)흐르는 물 졸졸 논바닥 소발자국 채우고

(煖烟桑枯鵓鳩啼)따뜻한 날 뽕나무 가지에 비둘기 앉아 우네.

(阿翁解事阿童健)늙은이는 일을 알고 젊은이는 씩씩하여

(刳竹通泉過岩酉)대나무홈통 물을 논에 대고 언덕을 넘기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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