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인 편집위원

내는 내가 생각해도 요즘 참 바쁘게 산다. 혹자들은 직장 출근도 안 하면서 뭐가 그리 바쁘냐고 빈정대기도 하지만.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내 사는 용인으로 서울로 학교로 스터디그룹으로 정신없이 돌아친다. 그러다가 수요일 저녁이면 평생교육원 강의를 마치고, 시골고향 여주로 어머니를 뵈러 내려온다. 금요일까지 조용히 독서도 하고, 서예공부도 하다가 싫증나면 기타도 쳐본다. 시골에 요일을 정해 내려오는 것은 어머니의 밥상 때문이기도 하다. 평소 혼자 계시면 반찬을 거의 안 해 드시다가, 자식 놈이라도 오면 반찬의 가짓수가 틀려진다. 내도 엄마 손맛이 좋다지만, 당신에게도 넉넉한 밥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철에 맞는 텃밭 가꾸기도 중요일과다. 2주전에 뿌려 논 상추와 아욱이 서로 비집고 올라오는 모습들이 꼭 내가 사회생활 속에 부대끼던 그 어떤 모습에 비교되어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엊저녁 늦은 시간에 시골집에 내려와 주차를 하고 마당을 밟으니, 오랜만에 소음 아닌 정겨운 개구리소리가 반겼다. 예전 기억으로는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웠던 것이 모내기철로 기억되는데, 아마도 보름이상은 계절이 이른 듯하다. 무질서한 듯 혼돈(渾沌)속인 듯 저 합창 속에도 일정한 음률이 있으리라. 문득 장자 응제왕(應帝王)편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남해임금을 숙이라 하고, 북해임금을 홀이라 하며, 중앙임금을 ‘혼돈’이라 하였다. 숙과 홀이 어느 날 ‘혼돈’의 땅에서 만났을 때 ‘혼돈’이 그들을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상의하여 혼돈의 덕을 보답하려 했다. “사람들은 모두 7개의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이 혼돈에게만은 없으니, 시험 삼아 뚫어 주자”하고 하루에 한 구멍씩 뚫어 7일이 되었는데, 7일이 되어 ‘혼돈’은 죽고 말았다. 南海之帝為儵,北海之帝為忽,中央之帝為渾沌。儵與忽時相遇於渾沌之地,渾沌待之甚善。儵與忽謀報渾沌之德,曰:「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此獨無有,嘗試鑿之。」日鑿一竅,七日而渾沌死。⌋여기서 혼돈은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자연의 질서라 한다. 저 개구리들의 합창도 때를 알고 나왔다는 자연의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라 이해하니, 자장가로 들리며, 장자의 무위자연의 표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구리 얘기가 나오니 꼬맹이 시절 봄이면 동무들과 논두렁 밭두렁으로 개구리 잡으러 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는 농약도 안치던 시절이라 들판의 생물들이 거의 모두 먹을거리가 되던 때다. 봄나물은 물론이요, 삘기, 고구마 맛이 나는 메 뿌리, 고추장 찍어 먹으면 일품인 찔레 순, 올미 열매뿌리 등등. 그리고 끼니 있기가 참으로 어려웠던 그 시절에 시골 아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단백질원으로는 단연 개구리가 으뜸이었다. 등이 푸른 것이 암컷이요, 교련복 같은 무늬가 수컷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개구리를 움켜잡아 땅바닥에 패대기치면 쪽 뻗는다. 몸통을 발로 밟고 다리를 쭉 당겨서는 꿰미에 줄줄이 꿰어 가지고 와 손질해서 프라이팬에 볶아 놓으면 옥수수 알맹이 같은 개구리 다리 근육 알맹이들이 꼬들꼬들한 게 일품이었다. 그 때는 단백질이 부족한 신체에서 요구하는 욕구에 부응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커서 알게 되었지만, 게임기에 빠져 사는 요즘 아이들과는 공유하려야 할 수 없는 특별하면서 즐거운 추억이기도 하다.

이튿날 아침, 이른 조반을 하면서 창 밖에 누군가 철지난 솔개연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일기예보에 비바람이 있다는데, 아직 비는 오지 않고 식전 댓바람만 불어 댄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웃으신다. 연은 무슨 연? 땅콩파종 밭인데, 종자를 비둘기가 하도 파먹으니, 허수아비처럼 비둘기를 쫓아 버리려 걸어 논 솔개 모형이란다. 내도 웃음이 나왔다. 어려서 강원도 첩첩산골의 외가댁에 갔을 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병아리들을 고깔 같은 싸리가지 둥지도 덮어 놓았었다. 풀어 놓고 기르면 안 되냐고 외할머니께 여쭈었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저 솔개 때문이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닌 게 아니라 솔개가 빙빙 돌고 있었다. 솔개라는 말도 처음 들었던 걸로 기억된다. 저 밭 가운데 일렁이는 솔개 모형에 비둘기들이 속아 줄지는 의문이다.

전원풍경 내지 전원생활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어려서는 일상생활이었는데, 용인에서 아파트 속에 갇혀 살다보니, 개구리 소리의 자장가 멜로디와 솔개의 여유로움을 무심코 잊곤 있었다. 몸이 열 개라도 바쁘다는 농군의 발걸음과 땀방울도 새삼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는 존재감의 화신이리라. 그것을 일깨운 것은 어찌 보면 어머니의 배려이기도 한 듯한 느낌은 왜일까. 굳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떠올리지 않아도 시상(詩想)은 도처에 도사린 곳 고향의 상큼함을 느껴본다. 개구리의 합창과 솔개모형의 외로운 몸짓에서 또 다른 상큼한 전원의 훈풍을 들이마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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