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문 편집위원

지난 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으로 그 동안의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의 물결이 일렁이더니 비로소 박수칠 일이 생겼다. 한시바삐 재개되기를 바랐던 금강산 관광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정부에서 큰맘을 먹었는지 4월 말부터 ‘평화안보 체험 길’을 개방한단다. 북쪽하고 사전에 협의가 되었다는 뜻이니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기리라.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필자의 아들이 복무했던 GP가 철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벅차오름을 실감했었는데 DMZ 평화둘레길이라니, 둘레둘레 걷다보면 그야말로 뜨거운 기운이 머리위로 솟구칠게다.

한반도 허리에 둘러진 철책을 기준으로 동부의 고성지역은 통일전망대에서 시작해 해안 철책을 따라 금강산전망대까지, 서부의 파주지역은 임진각에서 시작해 도라산 전망대를 경유하여 철거된 GP까지, 그리고 백마고지 전적 비에서 시작해 DMZ 남측 철책 길을 따라 화살머리고지까지 이어지는 중부의 철원지역. 백마고지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마음이 울컥한다. 아버지.

필자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다. 그것도 9사단 30연대 소속으로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하여 어깨와 팔에 관통상을 입은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몸에 박혀있는 총알까지도.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우직한 성품은 남들은 다한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45년 전, 방과 후에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중동에서 상대원으로 이어진 158계단을 내려와서 친구들과 하나 둘 헤어지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허름한 대문 위에 걸려있던 노란 등과 그 위에 쓰인 검은 글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았다. 그러나 왁자지껄한 마당을 지나 향내가 진동하는 방안에 들어섰고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꾸벅 절을 하고나서도 그랬다. 옆에서 소리 내어 울던 엄마가 ‘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울지도 않느냐!’하며 역정을 낼 때 그제서야 알았다. 아! 아버지.

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복무하는 동안 치열한 전투를 겪었고 기간을 넘겨서야 통신병과 이등중사로 제대할 수 있었다.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영등포우체국 교환주임으로 근무하던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게 된 건 아버지의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가 3년여를 병석에 누워 지내다가 필자가 어머니의 역정을 듣게 되었던 그 전날까지도 어머니는 딸기며 바나나를 매일 아버지의 머리맡에 두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부러웠고 그 것들이 내 차지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학교에 다녀와서 방안에 들어서면 그 것들이 먼저 보였고 아버지의 이부자리 옆엔 훤칠하게 잘깍인 연필이 놓여 있었다. 그건 필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지금까지 필자에게 딸기와 바나나, 잘 다듬어진 연필로 남아있다.

치열한 전투를 겪고 아버지가 받았던 화랑무공훈장 두개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증언으로 손위의 형들이 엿 바꿔 먹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라진 훈장과 함께 자신의 공로 또한 내던진 것일까? 훈장은 사라졌지만 주변과 전우들의 증언으로 국가유공자 신청을 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니 말이다. 그랬었더라면 필자는 지금의 공무원이 아닌 다른 시험에서 먼저 떨어지지 않고 합격했을 것이다.

40대 초반에 남편을 여의고 여러 자식을 부양하며 겪은 어머니의 인생역정은 필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아픔이 있었으리라. 말년을 살아가는 어머니를 보고는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지지리 없다’ 라는 말을 거슬러 죽고 없는 남편을 대신하여 남편 복을 만들어볼 요량으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봤다. 아버지의 너덜거리는 전역증명서와, 병적기록부 등을 들쳐 내며, 사병일 때의 군번과 하사가 되어 바뀐 군번을 엮어 보기도 하고 제적등본을 펼쳐내 입대 기록도 살펴보면서 육군본부와 국방부 등에 하소연을 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육군본부(사령부)를 통한 위에서 부터 수여한 훈장은 자료 확인이 가능하지만, 그 당시에는 전시상황이라 부대에서 훈장을 수여한 후에 위로 진달한 경우도 있기에 그런 경우 자료를 찾아내기가 어려우며, 아버진 하사가 된 후 군번도 바뀐 상황이라 더더욱 곤란하단다. 그렇게 요양원에 있는 말년의 어머니에게 주려고 했던 ‘남편 복’ 선물은 이루지 못했다.

지난겨울은 춥지도 않았지만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로 인해서 떨림이 가시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를 자주 떠올렸다. 그것이 원망인지 그리움인지는 구분하지 않겠다. 따뜻한 봄이 시작된 후, 엊그제 아버지의 기일을 보내고 오늘 DMZ 평화둘레길 소식을 접하면서 아픈 역사로 남아 있는 백마고지와 거기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살점들을 생각하곤 지금 손에 잡힌 연필을 꼭 쥐어본다. 아버지를 되새김하게 한 DMZ 평화안보 체험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평화 통일과 미래의 번영으로 가는 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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