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까지 5회에 걸쳐 분야별 전문가 초청 포럼

인천 중구가 구민의 소리를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구민중심 소통행정 구현으로 중구 구민으로서의 자긍심과 구정에 대한 이해와 만족도를 높이기위해 분야별 행정혁신 방안 마련에 본격 나섰다. 중구는 이를 위해 올 11월까지 5회에 걸쳐 전문가를 초청해 구정현안 및 문제점을 진단하는 포럼을 개최한다.

2일 중구청 월디관에서 열리는 독립운동 역사문화 콘텐츠개발 연구용역 관련 학술포럼에서는 100년 전 자유공원에서 한성정부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렸던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찾는 중구의 역사성을 재조명한다. 사진은 인천 감리서 원경 <사진제공=인천 중구청>

중구는 2일 독립운동 역사문화 콘텐츠개발 연구용역 관련 학술포럼, 6월 지역축제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 8월 주민자치 역량 강화와 지역 공동체복원 및 활성화 방안, 10월 중구의 교육 현실과 개선방안, 11월 일자리 창출의 원천이자 경제성장 동력인 항공정비 사업유치 지원방안 마련 등 5회에 걸쳐 진행하는 포럼을 통해 도출된 대안을 구정에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그 첫 번째로 2일 중구청 월디관에서 열리는 독립운동 역사문화 콘텐츠개발 연구용역 관련 학술포럼에서는 100년 전 자유공원에서 한성정부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렸던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찾는 중구의 역사성을 재조명한다. 중구는 이번 포럼에서 인천 중구와 백범 김구의 인연과 그 역사적 의미를 주민들과 공유하고 관련 기념시설 조성 방안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해 독립운동 관련 사업과 인천 중구의 발전전략을 모색한다.

이번 포럼은 ‘인천 중구와 김구 그리고 홍진’, ‘김구 관련 기념시설 현황과 제안’, ‘중구 역사문화공간 조성 방안’을 주제로 진행되며, 특히 역사적 고증을 통한 백범 김구의 인천감리서 탈출로 발표를 예정하고 있어 학계의 이목을 끈다. 포럼은 인천시사편찬위원회 강옥엽 전문위원이 사회를, 사)인천개항장연구소 강덕우 대표가 토론좌장을 맡으며, 인하대 사학과 양윤모 초빙교수, 인하대한국학연구소 유창호 연구원, 인하대 문화컨텐츠문화경영학과 김상원 교수가 발제자로 참여한다. 또한 동구사편찬위원회 안정현 상임위원, 인하대박물관 추교찬 학예사, 안동대기초교육원 권지혁 초빙교수 등 전무가가 토론자로 나서 포럼을 달군다.

홍인성 구청장은 “이번 포럼을 통해 인천 중구와 백범 김구 선생의 인연을 널리 알리고, 향후 백범 김구와 관련된 전시시설 등 역사문화공간 조성 방안에 제언하는 등 주민과 학계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청년김구기념관’ 설립과 김구 동상 이전에 대한 제언

국내의 김구 관련 기념관들은 모두 김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역사적 장소성이 실재한다. 서울의 두 곳은 김구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 성역화된 곳이라는 장소성이 있다.

충남 공주, 전남 보성·함평에 있는 김구 관련 기념관은 김구 스스로 ‘방랑의 시기’라고 했던 청년기에 인천감옥을 탈출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며 잠시 숨어지내던 장소이다. 광주의 경우는 이러한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김구의 희사금이 종자돈이 되어 해방 후 전재민들을 구휼한 인연을 강조하고자 기념관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보다 더 큰 아쉬움은 김구 스스로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명명했던 인천에는 이같은 기념시설조차 없다는 것이다.

인천은 김구가 두 차례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한 인연이 있다. 첫 번째는 1896년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7월에 인천감리서 감옥에 투옥되었고, 1898년 3월에 탈옥하였다. 두 번째는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판결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14년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매일 쇠사슬에 묶인 채 인천항 축항공사에서 노역하였다.

과거 김구가 수감되어 있던 인천감리서나 노역을 한 인천항 축항의 흔적들이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완전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옛 감리서 터나 그 주변에 적당한 유휴부지, 또는 의미있는 건물들을 활용하여 기념관을 만들고, 그곳에서 전시물이나 재현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김구 시대의 인천을 알릴 수도 있다.

어찌보면 김구가 1896년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게된 것도 본인에게는 큰 행운일 수 있다. 김구는 인천감리서에서 만국공법의 체제와 근대문명을 접하고 그 동안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던 위정척사사상과 동학사상을 되돌아 볼 수 있었으며, 때 마침 생겨난 근대적 사법제도를 통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전국의 애국지사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김주경이나 유완무 같은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을 결집시키는 계기도 된 것이다. 따라서 앞서 필자가 인천이 김구에게만 ‘의미심장한 역사지대’가 아니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인천감리서가 가진 역사적 장소성이 김구 뿐 아니라 인천의 지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세밀히 고찰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천감리서 터에 김구 기념관이 만들어진다면 김구와 더불어 인천 객주들, 그리고 감리 및 감리서 직원들과의 관계도 함께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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