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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제이(借夷制夷]-오랑캐의 힘을 빌려 오랑캐를 제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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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2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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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편집위원

“중국은 한(漢)나라 때부터 ‘이(夷)로 이(夷)를 견제한다는 ’차이제이(借夷制夷)‘ 또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이이벌이(以夷伐夷)’의 외교 계략을 실행해왔다.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하여 나라 이름을 중국(中國)이라 불렀다. 이러한 사상이 바로 중화사상(中華思想)이다.”

중국인들은 나머지 주변 국가들을 모두 오랑캐를 나타내는 글자를 써서 동쪽을 이(夷). 서쪽을 융(戎), 남쪽을 만(蠻), 북쪽을 적(狄)이라 불렀다. 그 가운데 ‘이(夷)’라는 글자는 동쪽의 국가는 물론 중국 이외의 국가를 두루 포괄하는 대명사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한나라 때 중요한 외교 상대는 흉노였다. 따라서 외교적으로 어떻게 흉노를 굴복시키느냐 하는 것은 한나라의 안정과도 직결되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한은 서역(西域)과 교류하여 흉노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기원전 138년 한 무제는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후한 상을 내걸고 대월씨(大月氏)로 갈 사람을 모집했다. 여기에 훗날 서역을 개척하여 이름을 떨친 장건(張騫)이 뽑혔다.

장건은 대월씨로 가는 도중에 두 번씩이나 흉노에게 붙잡혔다가 기원전 126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12년 만의 귀국이었다. 장건의 출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서역과 관련된 대단히 귀중한 자료들을 수집해왔다.

기원전 119년, 한나라는 사막 북쪽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북으로 숨은 흉노는 알타이 산을 근거지로 삼아 한에 대항했다. 무제는 서역과 통교하여 흉노를 고립시킨다는 기본 전략아래 대규모 사절단과 함께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오손(烏孫)‧대완(大宛)‧월씨(月氏)‧강거(康居) 등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사신을 주고받았다.

흉노는 한과 서역의 통교를 저지하기 위해 서역에 이르는 요충지 누란(樓蘭)과 거사(車師)에 강한 압력을 가했다. 무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누란왕을 포로로 잡고 거사를 격파함으로써, 오손이 흉노에서 떨어져 나와 한과 손을 잡도록 만들었다. 동한시대에 반초(班超)는 전후 31년 동안 서역을 넘나들며 서역의 군대와 식량을 빌려 서역 지역의 반란을 제압하고 흉노를 꺾음으로써 서역 50여 개 국을 한에 예속시켰다.

이 외교 책략은 뒷날의 외교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역대 외교정책에서 유효하게 활용되었다. 그 까닭은 중국의 역사상 황실과 북방 소수 민족의 모순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강적은 대부분 북방에 존재했다. 한나라 때의 흉노, 수당 시대의 돌궐, 송대의 여진, 명대의 첩목인조(帖木儿朝), 청대의 사아(沙俄)가 그런 존재들이었다. 역대 통치자들은 모두 상대의 모순을 이용하여 외부의 힘으로 주요한 적을 고립시키고 공격하는 데 힘을 쏟았다. ‘차이제이’는 중국의 오랜 외교 책략이라 할 수 있다. 동한시대에 반초는 명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적(夷狄)으로 이적을 공격하는 것이 좋은 계책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이이제이’ 계략이다.

그러나 이 계략의 성공 여부는 계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계략을 실시하는 조건에 있다. 하나는 내적 조건, 즉 자기의 강한 힘과 실력으로 뒷받침하고 거기에 유능한 외교가가 있어야 한다. 한나라가 이족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차이제이’의 계략에 의존하고 또 한편으로 강한 통치 역량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만약 한나라의 통치자가 외교 공세를 펼침과 동시에 능력도 없이 무력 정벌을 감행하거나, 장건이나 반초와 같은 위대한 외교가가 없었더라면 그런 외교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외재적 조건, 즉 당시의 형세가 이 외교 책략을 실행하는 데 유리한가의 여부이다.

청나라 때도 ‘차이제이’의 외교 책략을 취했지만 오히려 실패하고 말았다. 청은 전반기에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지키면서 서양인들이 중국에 들어와 장사를 못 하도록 엄격하게 금지했다. 말하자면 쇄국 정책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른바 ‘하늘이 내리신 이 청 왕조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오랑캐 물건을 통상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다.

외교 교섭에서도 늘 외국 사신들의 무릎을 꿇려 절을 하게 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쫓았다. 그러나 1800년을 전후하여 청은 부패가 극심해졌고, 외교적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예가 잦아졌다. 이때 이후로 청의 외교는 ‘이이제이’의 계략으로 바뀌었다. 이홍장(李鴻章)은 일찍이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왜인은 러시아를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합니다. 그러니 왜인들에게 많이 양보하고도 왜인들이 우리를 돕지 않게 하는 것보다는, 러시아에게 조금만 양보하여 그들로 하여금 왜인을 겁주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청이 선택한 ‘차이제이’의 계략은 ‘이’의 힘을 ‘빌리지’도 못했고 더욱이 ‘이’의 침략을 제지하지도 못한 채, ‘중화의 풍부한 산물로 다른 나라의 환심을 사는’ 비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차이제이’의 외교 책략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따른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일간경기  ilgang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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