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첫눈이 오면 놓아 주겠다.”

문재인 정부의 분위기 메이커이며 탁월한 미란다 기획자로 알려진 탁현민 행정관이 “1년이 지났으니 그만 놓아달라”며 사의를 표명하니까 임종석 비서실장이 “가을에 남북정상회담 등 중요한 행사가 많으니 그때까지 만이라도 일 해달라.”면서 탁 행정관에게 ‘첫눈이 오면’  놓아 주겠노라면서 사직을 만류했단다. 이제는 꿈과 낭만의 대명사였던 첫눈도 정치인이 애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눈은 첫눈만 있는 게 아니다. 가랑눈, 가루눈, 길눈, 날린눈, 도둑눈, 마른눈, 만년눈, 밤눈, 복눈, 봄눈, 소나기눈, 솜눈, 숫눈, 싸라기눈, 자국눈, 잣눈, 진눈, 진눈깨비, 찬눈, 포슬눈, 풋눈, 함박눈 등 많기도 하다. 하지만 귀하고 소중한 눈은 ‘사람 보는 눈’이다. 인사가 만사라는데 보는 눈이 션찮으면 자리만 바꿔치기하다가 끝장난다.

지난 10월 18일 강원도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이는 작년에 비해 보름 정도 빨랐단다. 그러나 그것은 서울의 첫눈이 아니었다. 서울의 ‘첫눈’ 판정은 아무렇게나 내리는 게 아니란다. 기상청은 현재 서울시 동작구 신대방동에 있다. 1998년까지는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 1번지의 서울 기상관측소 즉 옛 중앙관상대, 더 옛날에는 경기도립경성측우소였던 그곳 근무자가 맨눈으로 내려오는 눈을 확인해야 비로소 서울에 ‘첫눈’이 온 것으로 공식 판정된다. 강남이나 영등포 국회의사당에 눈이 내렸어도 송월동 기상관측소 근무자가 보지 못하면 ‘서울에 눈이 왔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이다. 시스템이 그렇다는 얘기다. 첫얼음도 마찬가지다. 송월동 관측소에 설치된 금속제 관측 용기의 물이 얼어붙으면 ‘서울에 첫얼음이 얼었다.’라고 발표한다. 다만, 벚꽃의 개화는 여의도로 내려간다. 국회의사당 북문 건너편 벚꽃 군락 중 관리번호 118∼120번 벚나무가 각각 3송이 이상 완전히 꽃을 피웠을 때 ‘벚꽃이 피었다’라고 말한다.

유홍준 전임 문화재청장의 우스갯말 한 토막이다. 정부의 청장 회의 때 서로 자기네 관할 구역이 넓고 힘들다는 주제의 대화가 오갔다. 먼저 산림청장이 국토의 2/3가 담당이라면서 울상을 짓자, 대한민국 경찰청장은 국토 전체의 인구가 자기 담당이라고 했다. 해양경찰청장은 국토의 4배인 영해 전역을 담당한다고 응수했다. 이에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젊잖게 국토 전체와 영해 전체의 문화재와 외국으로 나가는 천연기념물들까지 내가 담당한다면서 의자를 뒤로 젖혔겠다. 이때, 기상청장이 ‘내 구역은 국토와 영해는 물론 하늘까지’라고 해서 다른 청장들이 찍소리도 못하고 수그렸단다. 관공서 중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내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곳은 기상청뿐이다. 매직펜 하나로 7, 80년대 한반도 날씨를 주물렀던 중앙관상대의 김동완 선생은 대한민국 제1호 기상통보관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하나님보다도 더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면서 농사를 지으셨다. 비가 온다면 왔고 구름이 낀다면 꼈다. 바람이 분다면 불었다. 천둥벼락이 친다면 진짜로 치는 곳이 꼭 있었다.

정치는 감동의 쇼(show)다. 탁 행정관의 정치 퍼포먼스는 이성보다는 정서적이며 극적인 연출로 국민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에서부터 시작해서 지난해 취임 초기 청와대 새 참모들과 관내를 산책하던 커피타임 그리고 지난번 남북정상회담 때의 ‘도보다리 산책’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퍼포먼스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통일이 금방이라도 돼 지상낙원이 될 것 같은 환상에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눈이다. 이제는 그냥 문을 탁 닫고 떠나도 좋을 때가 왔다. 첫눈치고는 엄청나게 내렸다. 완전 폭설 수준이었다. 아침나절부터 3시간 동안에 무려 8.8cm가 쌓였고, 28년 만에 최고 기록도 갈아치웠단다. 그런데 웬걸, 저녁나절이 가까워지니 그 많던 첫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 봐도 뻔하지만, 세종로 1번지에서 몇몇 가족들을 힘겹게 부양하는 임 모 씨가 눈알을 끔뻑거리면서 둘러대겠지, “이게 첫눈이냐? 난 못 봤거든.”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