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청 강구인

코흘리개 어린 시절, 종이도 귀하던 1960년대였다. 당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자식에게 한글과 기본 숫자라도 깨우쳐 보내겠다는 선친께서는, 좁은 단칸방에 시멘트 종이포대를 잘 펴서, 가갸 거 겨, 1 2 3 4…를 정성스레 붓글씨로 써서 붙여 주셨다. 티브이나 라디오는커녕 전기보급도 안된 시절이었다. 바깥에서 또래 꼬맹이들과 놀다가 집에 들어오면 그냥 무턱대고 읽곤 했고, 집에는 읽을거리가 전혀 없던 시절이라, 옆집 1년 선배네 집에 가니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가 있기에 주어들고 읽곤 했다. 그 당시 그 선배는 한글을 잘 못 읽을 때였으니, 나 때문에 선배만 애매하게 혼나게 한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50년도 더 지난, 나의 첫 번째 붓글씨 경험이다.

두 번째 붓글씨 경험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었다. 그 당시 방학은 방학이 아니었다. 숙제가 찌들 정도로 많았다. 방학책, 일기쓰기, 만들기, 그리기나 서예, 곤충채집, 식물채집 등으로 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부터는 밀린 일기를 시작으로 숙제를 시작하느라 애먹었다. 숙제들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8절지 습자지에 붓글씨를 정성들여 써가서 겨울방학까지 학급 뒤편 알림판에 첩부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문구는 외국의 발전사례를 소개하는 국어책 문장 중에서 좀 멋지다는 내용 몇 자를 추린 것으로 기억된다. 삐뚤빼뚤 잘 못 쓴 글씨지만, 그리지 않고 말 그대로 썼다는 데서 점수를 받았다.

세 번째 붓글씨는 대학교 입학하니, 그 때만해도 캠퍼스에서 동아리활동이 활성화 되던 때라, 서예반에 가입했다. 그러나 동아리활동을 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기에 동아리 활동은 맘속으로만 하였다. 그렇지만 집안 제사를 엄격히 챙기면서 명절의 지방과 조상님 각위 기일의 지방, 축문을 꼭 챙기며 가끔 세필(細筆)을 잡곤 했다.

그러던 차에 지난 2016년 4월에 직원서예동아리 회원모집 소식을 접하고 시작하여, 동아리가 와해 직전까지 가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도 바라던 기회인지라 기초부터 배워보겠다고 시작하여 나로서는 네 가지 글씨체를 습작하고 있다. 어언 3년 여를 지나 올 4월에는 10여명의 회원이 서가협회의 작품전에 입상을 하였고, 그래도 졸작수준이지만 좀 더 각성하고 발전의 기회로 삼고자 이달 8일부터 시청로비에서 40여점의 작품전시회를 갖는다. 우리가 추구하는 교양적인 취미의 하나로, 신언서판(身言書判) 중 글씨로 우리회원들이 품평을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역경을 헤치고, 오늘의 전시회를 준비해주신 필연(筆緣, 붓으로 맺은 인연, 용인시청 서예동아리)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용인시 직원여러분의 고견과 질책을 겸허히 기다리며, 필연(筆緣)의 영속성을 기원한다.

어찌 보면 공직생활 중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될듯하고, 그간 미력하나마 회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한 회원들께 말로 하기는 쑥스러워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는 바이며, 야간임에도 열정으로 교수해 오고 계신 심연(心淵) 선생님과 걸작 두 점을 제공한 친구이자 인사동 세심헌(洗心軒)의 죽암(竹庵)께도 사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고마워하고 싶은 대상은 통기타와 더불어 서예(書藝)라는 평생 취미를 갖게 된 내 자신(自身)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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