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 독도는 우리 땅 (중략)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섬이라 /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 신라 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 독도는 우리 땅 우리 땅”

이번 주 목요일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최근 일본 아베 총리가 극우적 성향의 강경파 인물들을 전면배치한 상황이다. 그중에는 독도에 상륙하겠다고 해서 물의를 빚었던 자민당 개헌추진본부 간사에 신도 요시타카 전 총무상을 임명했다. 그는 지난 2011년 독도와 가까운 울릉도에 가겠다고 김포공항에서 9시간 넘게 소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누가 뭐라 해도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영토박물관인 ‘독도박물관’이 있고,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한 독도는 분명히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만든 지도에는 독도뿐만 아니라 대마도까지 포함하여 우리 땅이라고 인정했었다.

1997년 8월 8일, 독도박물관 개관식을 보고 내친김에 독도까지 방문하려고 울릉도에 갔었다. 수원에서 포항까지 4시간 동안을 야간 버스로 이동했다. 다시 포항에서 울릉도까지 3시간 이상 배를 탔지만, 피로감은 없었다. 그때는 광복절을 1주 정도 앞둔 시점이라서 ‘독도사랑’에 대한 열풍 또한 대단했었다. 30여 년 동안 일본과 중국 등에서 수집한 귀중한 자료 861종 1366점을 기증하고 초대 독도박물관장으로 취임했던 사운 이종학 선생은 우리 고장 출신의 서지학자였다. 현지에서 선생을 뵙고 ‘오산’에서 왔다고 하니 더욱 반갑게 맞아주셨다. 필자는 제1회 지방선거 이후 오산시사를 편찬하라는 특명을 받아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을 돌면서 옛 자료들을 수집하던 때였다.

독도박물관하면 이종학 선생이 생각난다. 그야말로 독도처럼 외롭던 분이셨다. 그의 나라사랑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역사는 돌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잊혀버리고 만다”라면서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입증하기 위해 살아생전 막대한 사비를 들여 50여 차례나 일본을 드나들면서 각종 고문서와 책자를 수집했다. 그 자료들을 근거로 일본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기 위해 홀로 무진 애를 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5월 23일, 3년 만에 독도박물관은 문을 닫았다. 정부의 미온적인 독도정책에 항의하며 사표를 쓰고 박물관장직도 내놓았다. 그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일본은 입법·사법·행정부를 총동원해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승진 2대 독도박물관 관장이 전하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어느 날, 이종학 관장님과 함께 시장에서 방어 몇 마리를 샀단다. 그것을 바람이 잘 통하는 옥상에다 잘 말려놓으라고 하시더니, 며칠 후 모 주류회사에서 생산한 ‘독도 소주’와 방어 한 마리씩을 정성껏 포장하시더란다. “자, 이제 됐다. 독도 방어다” ‘독도(소주) + 방어(물고기)’를 청와대, 국회, 관계부처와 관련 기관 등에 선물로 보냈으나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났단다. 사운 선생의 정성과 손때가 배인 자료들은 독도박물관 외에도 수원박물관,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에서 언제라도 쉽게 볼 수 있다.

사운 이종학 선생은 2001년 3월,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자료들을 북한 평양인민대학습당에서 전시했다. 남한은 제대로 일본에 대항하지 못하지만, 북한이 확실하게 해달라는 바람에서 전시 후에는 그 자료들을 고스란히 평양에 남겨두고 돌아왔다. 독도를 지키는 데는 남북이 따로 없으며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었다. 북한 방문 이후 급격히 쇠약해진 선생은 2002년 11월 세상을 떠나셨다. “한 줌 재가 되어도 우리 땅 독도를 지키겠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묘소는 독도박물관 옆에 안장되어 저세상에서도 독도를 지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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