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손짓하면 닿을 듯… 실향민 3만명 정착

▲ 북녘이 보이는 교동도 망향대.
▲ 북녘이 보이는 교동도 망향대.

최근 남북정상회담 등 평화 무드로 실향민들 설레

서해 교역로… 대룡시장 교동향교 화개사 등 인기

강화 교동도는 남북이 합의한 한강공동수역의 끝에 해당한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에 합쳐진 강물은 교동도를 통해 서해 넓은 바다에 도달한다. 교동도에는 지금도 실향민이 많이 살고 있다. 황해도 옹진이나 개성 해주가 고향인 실행민이 적지않다. 전쟁을 피해 잠시 섬으로 피해왔는 데 70년이 넘었다. 북한 땅을 바로 마주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여망이 공존하는 곳으로 주목받는다.

◇ 분단의 아픔 속 피어오르는 통일의 희망

한반도가 분단되기전 교동도와 북한 황해도 연백군(현 황해남도 연안군·배천군)은 같은 생활권이었다. 교동도에서 북한 땅과의 거리는 3㎞ 남짓, 최단 거리는 2.6㎞에 불과하다. 교동도와 황해도 사이 바다는 물이 빠지면 모래톱이 드러난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황해도 주민 3만여 명이 잠시 피난 왔다가 한강 하구가 가로막히면서 실향민이 됐다. 이들은 고향 땅과 그곳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섬 서쪽 북단 율두산 아래에 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망향대에서는 맨눈으로도 발아래 논과 철책선, 바다 건너 북한 땅이 보인다.

교동도의 중심인 대룡시장은 북한 이주민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고향에 있던 연백시장을 본떠 만들었다. 100명 남짓 남은 실향민들은 여전히 대룡시장 인근에 모여 산다. 대룡시장은 50여 년 동안 교동도의 경제 중심이었으나 교동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쇠락하면서 시장의 규모도 크게 줄었다.

교동대교 개통 이후 1960∼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새 단장을 했다. 골목 곳곳에 향수를 자극하는 벽화가 그려졌고,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흑백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 등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점들이 들어섰다. 대룡시장 옆 관광 안내소인 교동 제비집은 첨단 ICT(정보통신기술) 시설을 갖추고 관광객을 맞는다. 민관이 함께 추진하는 '평화와 통일의 섬 교동도' 프로젝트의 하나로 지난해 3월 문을 열었다.

◇ 흔적으로만 남은 군사 요충지

지금은 강화군에 면으로 속해 있지만, 고구려에 속했을 때 교동도는 별도의 현(고목군현)이었다. 고려 때는 개성으로 가는 길목으로써 교역의 요지였다면, 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방어하는 군사적 중요성이 커졌다.

1629년(인조 7년)에는 한성 방어를 위해 남양(현재 경기도 화성)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도로 옮기면서 교동도호부로 승격됐다. 이때 쌓은 교동읍성(시도기념물 제23호)은 둘레 870m에 동·남·북에 세 개의 성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고,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홍예문(아치형태의 문)과 석축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해체 복원했다.

1633년(인조 11년)에는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를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읍성 아래 섬 남단의 남산포에 설치됐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수군의 배를 묶어두던 계류석이 하나 남아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주민에게 물어물어 찾은 계류석은 민가의 창고 옆 구석, 쓰레기더미에 가려져 있었다.

◇ 최초 교동향교와 화개사

교동도 동쪽 화개산 아래의 교동향교(시도유형문화재 제28호)는 고려와 조선 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교동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년)에 지어졌다. 교동향교는 향교 중의 으뜸이라는 뜻의 '수묘'(首廟)로 꼽힌다. 서해 고도(孤島)의 향교가 수묘로 꼽히는 이유는 이 땅에서 공자상을 처음 모신 곳이기 때문이라 한다.

고려의 수도 개경(현재의 개성)은 국제적인 무역도시였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그 관문이었다. 교동도는 벽란도로 가는 상인과 사신이 탄 배가 물때를 맞추기 위해 기다리던 기착지였다. 충렬왕 12년(1286년) 원나라에 간 안유(안향, 1243∼1306)가 공자의 초상을 가져왔다. 배를 타고 개성으로 돌아가던 길에 교동도에서 물때를 기다리는데 공자의 초상을 아무 데나 둘 수 없어 교동향교에 모셔졌다.

명륜당 뒤 내삼문을 거쳐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에 대성전이 있다. 공자를 위패와 화상을 봉안한 사당인 문묘(文廟)다. 공자 외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4성과 주자(주희), 정호 등 송조(宋朝) 2현 그리고 설총부터 최치원, 정몽주, 김굉필, 안유, 이이, 이황 등 동국(東國)의 성현 18인 위패도 함께 있다.

향교를 나와 화개산 기슭으로 올라가면 화개사가 있다. 이 작고 적막한 사찰에 이야기를 더해주는 것은 고려 말 문신이자 정치가인 목은 이색(1328∼1396)이다. 화재로 모든 것이 불에 타는 바람에 고려 때 창건됐다는 것 말고는 다른 역사를 알 수 없는 이 사찰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곳이라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화개사가 자리 잡은 화개산(259m)은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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