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1873년 최대 권력자로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등

1863년 고종(1852~1919)이 열 한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한다. 권력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0~1898)에게 돌아간다. 이후 1873년 물러날 때까지 10년간은 대원군의 시대였다. 그는 요즘말로 적폐에 해당하는 세도정치를 청산하며 왕권을 다시 세우려고 노력했다. 경복궁을 중건했고 지역 유림의 권력지였던 서원을 철폐했다. 프랑스· 미군과 무력 대결도 불사했다. 일본에게는 조선에게 다가설 틈을 주지 않았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1873년 반강제로 권력을 내놓게 된다.

‘동방의 진시황’으로 불렸던 대원군.

◆권불십년 흥선대원군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대신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해 섭정하면서 시정잡배 시절 보고 느낀 점들을 정책에 반영해 나간다. 세제 개혁, 서원 철폐, 인재 등용, 비변사 폐지 및 의정부 부활 등의 개혁 정책을 단행한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재건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고 외부 세력에 대해서는 쇄국정치를 펼친다. 지방 유림들의 활동 터전이었으나 백성들의 원성을 산 서원을 철폐하자 양반들은 대원군을 ‘동방의 진시황’으로 부르기도 했다. 사창제를 실시해 환곡의 일부 폐단을 시정한다. 삼군부를 부활하고 무신 우대책을 펼친다. 강화도 방어를 강화해 강화유수를 무인으로 임명하기도 한다.

대원군은 국정에서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으로 만들고 태산을 깎아내려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높여 3층으로 만들겠다” 고 했다. 종친을 우대하고 남인을 중용하고 오랫동안 권세누려운 노론을 억누르겠다는 뜻이었다.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궁궐인 창덕궁까지 자신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근문(恭覲門)으로 통행하면서 권력을 과시했다. 1866년 고종의 결혼식은 대원군의 살아있는 권력을 보여줬다. 아들고종은 운현궁에서 명성황후와 결혼식을 올린다. 가례참가 수행인원이 1641명이었고 동원된 기마가 688필이었다. 운현궁과 창덕궁 가례 행렬 순서는 고종 대원군 민비 민씨부대 부인이었다. 살아있는 생생한 권력임을 과시했다. 통상 왕 다음에 왕비이나 대원군이 왕의 뒤를 바로 따랐다.

대원군 권력의 산실이었던 운현궁. 지금도 서울 중심가에 있다.

◆고종 친정 대원군 퇴진

1870년대 들어 고종이 성인이 되면서 대궐 안팎에서 대원군의 무소불위 권력을 비판하며 권력을 고종에게 넘겨야 한다는 기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873년 5월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가 올라온다. 주요 내용은 유능한 인재 등용이 안 이뤄지고 있으며 언로가 막혔고 왕궁 공사가 무리하게 진행된다며 비공개로 추진된 건천궁 공사의 중지를 주장했다. 고종은 상소를 올린 강진규의 견해에 동의한다는 표시로 강진규를 예조참판으로 승진시킨다.

마침내 최익현이 “대원군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고종은 최익현을 호조 참판에 임명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이어서 대원군의 퇴진과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최익현의 두 번째 상소가 올라온다. 친대원군파는 국청을 주장했으나 고종은 최익현을 유배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마침내 고종은 친정 의지를 확고히 하고 그해 11월 20일 운현궁을 방문한다. 대원군만이 드나들었던 궁궐 문이 굳게 닫힌다.

◆대원군 쇄국정책

대원군 퇴진을 요구한 최익현의 상소본.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부터 조선은 천주교가 널리 퍼지고 프랑스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했으며, 교세가 확장되어 천주교 신자는 점차로 늘어나 2만여 명에 이르렀다. 또한 의주나 동래 등의 지역을 통해 서양 상품이 들어왔다. 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와 교류를 강력히 거절했다.

1866년 카톨릭교 탄압의 포고령이 발표됨과 함께 프랑스 선교사 9명과 국내 신도 8000여명이 처형되는 병인박해가 일어난다. 프랑스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강화도에서 조선의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어 병인양요가 일어난다.

2년 뒤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을 거절당하자 충청도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다. 미국과도 충돌이 일어났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가 국경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다가 평양 군민(軍民)과 충돌하여 미국 상선이 침몰한다.

1871년 미국은 이를 구실로 삼아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제독이 이끄는 5척의 군함으로 강화도를 공격한다,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대가 광성보와 갑곶 등의 지역에서 미국 군함과 무력으로 맞붙는다. 신미양요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물리친 대원군은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는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이를 온 국민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운다.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조선의 근대화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중국도 섭정으로 조선과 상황 비슷

1872년 청나라 황제 동치제가 친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진다. 동치제 또한 어머니 서태후로부터 섭정을 받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서태후가 어린 동치제(재위 1861~1874) 대신해 섭정을 펼치고 있어 대원군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조선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1872년 12월 중국서 돌아온 박규수는 “내년에 청황제가 친정을 할 것이며 백성들이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라고 고종에게 보고한다. 20세가 넘은 고종도 강연에서 친정의 뜻을 밝혔으며 친정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고종은 1872년 11월 동지사겸 사은사를 청에 파견한다. 심복이자 민비 조카인 민영목이 서장관이었다. 동치제의 친정 여부 확인은 그의 비밀 업무였다. 민영목은 5개월 만에 동치황제 친정 공포 조서를 갖고 온다. 고종이 들떴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종신 섭정을 노린다. 결국 권력을 놓고 아버지와 아들은 충돌할 수 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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