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완 편집위원

평택, 평택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평택은 필자가 태어나고 살고있는 고향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고향이지만 특별하게 떠오르면서 남에게 홍보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부끄럽다, 먼저 평택하면 평택농악, 평택호관광지, 농특산품(배, 쌀 등)이 있을 것이다, 평택(平澤)은 윤택하고 평평한 들녘이 넓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북쪽에서 시작되는 나지막하게 높지 않고 봉황이 춤을 추는 산 형세 무봉산(舞鳳山)이 있고 시민들이 힐링하는 곳 성스럽게 풍요로운 불악산(佛樂山)이 있다. 옛날부터 진위와 평택 들녘에서 생산되는 쌀은 백성이 먹고, 궁안 들녘에서 생산되는 쌀은 궁 안에서 드셨다고 한다, 포승은 넓은 초지가 있어 조선시대에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었다. 그리고 소사들은 안성 땅이었고 서해안에서 들어오는 바닷물 때문에 뻘이 발달하여 조개가 많이 생산 되었다. 그래서 비전동에 조개터라는 지명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평택은 풍족한 자원 때문에 곡식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평택을 알려면 먼저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시대 때에 경기도의 진위현과 충청도 평택현을 알아야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 내정 간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시기는 1894년 청일전쟁이 유발시킨 시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능한 정부와 관리의 부패를 꼬집고 일제의 국권침투를 날카롭게 비판한 목소리가 있었으니 평택이 발원지가 아닌가 싶다. 평택시 지역 대부분은 옛 진위현·양성현의 남부지역과 옛 충청도 평택현이 포함되어 이루어진 곳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먹은 셈이다

옛 진위현은 본래 백제(또는 고구려)의 송촌활달인데, 후에 부산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년)에 진위현으로 개칭되었고, 수성군(수원)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1018년(현종 9년)에 수주(수원)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72년(명종 2년)에 감무를 후에 현령을 파견함으로써 독립했다. 조선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진위현은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어 경기도 남쪽 끝에 위치하게 되었다. 1433년(세종 15년)에는 수원의 속현이었던 영신현이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군이 되어 공주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년에 경기도에 속했다. 1907년의 월경지 정리 때 수원의 두입지인 오타면, 양성의 두입지인 소고니면이 진위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수원군의 15개면과 충청남도 평택군 일원을 병합하여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즉 진위군의 군내면·일북면·이북면·마산면이 북면으로, 이서면·일서면·이탄면이 서탄면으로, 일탄면·송장면·여방면이 송탄면, 고두면·종덕면이 고덕면으로, 성남면·병파면이 병남면으로, 수원군의 토진면·수북면·청룡면·감미면·율북면이 청북면으로, 포내면·현승면·승량면이 포승면으로, 안외면·광덕면·가사면·현암면이 현덕면으로, 숙성면·언북면·오정면이 오성면으로, 평택군의 읍내면·동면·북면·서면이 부용면으로, 군서면·군남면·경양면이 서면으로 통합되었다.

옛 평택현은 본래 백제의 하팔현(河八縣)으로, 757년에 평택현으로 개칭되었으며 1018년(현종 9년)에 천안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후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조선초 1413년(태종 13년)에 충청도 평택현이 되었으나 1505년 등 수차례 경기도로 이관되기도 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진위현과 평택현은 군이 되어 공주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년에 진위현은 경기도에, 평택현은 충청남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진위군은 수원군의 15개면과 충청남도 평택군 전역을 병합하여 면적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때 진위군의 성남면·병파면이 통합된 병남면이 1926년에 평택면으로 개칭되었다. 1933년 일본이 행정 개편하기전 고려시대 수주지역(수원,오산,화성,진위), 고려중기 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경기도 수원부 진위현, 진위군지역이었다, 1938년에 진위군을 평택군으로 개칭함으로써 평택군이 진위군의 이름을 대신하게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 진위지역에서 독립투쟁 등 사회적 문제가 심해서 진위 지명를 없애기 위해 통합하면서 지역간 이간질 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1939년에 평택면, 1963년에 송탄면, 1977년에 팽성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 옛 양성현 지역이었던 안성군 원곡면의 용이·죽백·청룡·월곡의 4개리와 공도면의 소사리가 평택읍으로 편입되어 동부와 동북부가 확장되었다. 1981년에 송탄읍이, 1986년에 평택읍이 각각 시로 승격되어 평택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통적인 농업지역이던 평택군과 시가지로 발전해왔던 평택시·송탄시가 다시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도농통합 형태의 평택시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평택은 전지역 걸쳐 개발이 환창이다. 서해안 중점 개발로 인한 안중․ 청북․ 소사벌․ 국제도시 고덕지구와 진위 ․ 마산 산업단지 지구 등 전지역에 걸쳐 공사 현장이다.

그래서 행정과 생활권이 북부,남부,서부으로 구분되어 지역별 불균형적인 개발과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이 혼란도 있지만 화합 도모하는 사회적 기초적인 문화부터 발전시켜야 하는 시급한 과제 안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속담도 있다. 우리가 사는 지역 내에도 일제강점기에 사용했던 지명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향토사를 발간하면서 우리지역의 실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일제 때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고 인용한 사실이 확인 되었는데도 수정, 변경 등 노력하지 않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이처럼 노력이나 충분한 검증도 없이 후손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전해주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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