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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왕이 된 강화도령, 외국으로 눈 돌리기엔…강화도서 농사짓다 1849년 ‘안동 김씨’에 선택돼… 강화도에 생가
  • 이두 기자
  • 승인 2018.05.1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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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철종 잠저 용흥궁

19세기 초반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렸다. 1849년 헌종이 자식없이 세상을 떠난다. 조정의 최고 어른인 안동 김씨파의 순원왕후(순조의 비로 김조순의 딸)는 속전속결로 강화도에 농사를 짓고 있던 이원범을 왕으로 천거했다. 조선 25대 왕 철종이다. 철종은 1863년까지 14년간 왕으로 재임했다. 철종 때는 일본이 1854년 개항하고 서구로 눈을 돌리던 시대였다. 조선에서는 삼정문란으로 백성의 삶은 날로 힘들어져 민란이 이어지고 동학이 백성들 사이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바닷가 곳곳에서는 이양선의 출몰이 잇따랐다.

◆강화도령 농사꾼서 하루아침에 왕으로

당초 안동 김씨에 의해 왕의 후보에 오른 인물은 이원범을 포함해 4명이었다. 이하응, 이하전, 이경응이 그들이다. 이하응(1820~1898)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 헌종이 승하했을 때 30세로 종친부 고위직을 맡고 있었다. 사도세자(장조)의 손자인 전계대원군의 아들이자 철종의 이복 형인 이경응(1828~1901) 역시 나이가 많았으며 역적 집안이라 배제됐다. 후계자로는 이하전(1842~1862)이 적격자였다. 선조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12대손 완창군의 아들이다. 헌종 승하 당시 8세였으며 명석하고 기개도 넘쳤다. 그러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에게 똑똑한 왕은 필요치 않았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기틀을 마련한 김조순(1765~1832)의 딸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권력에 방해가 되지 않을 ‘허수아비 왕’을 원했고 그가 바로 이원범이었다.

이원범도 역모사건에 연루된 가족의 인물이었다. 강화도에서 농사만 짓고 집안이 위태위태해 제대로 공부를 못했다. 이같은 이원범을 왕위 적격자로 만들기 위해 안동 김씨들의 노력은 집요했다. 강화도에 맞이하는 철종의 봉영 행렬은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문무백관과 왕실, 군사를 포함해 500여 명에 달했다. 철종은 강화도 갑곶나루에서 출발해 경기 김포, 서울 양천을 거쳐 도성에 도착했고 헌종이 세상을 뜬 지 나흘 만인 6월 9일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철종이 강화도에서 도성까지 47㎞를 행차할 때 길목마다 백성이 몰려 장관을 이뤘다. 19세기에 제작된 ‘강화도행렬도’는 나루터에서부터 강화읍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봉영 행렬을 묘사하고 있다.

순원왕후는 철종 집안과 관련한 기록을 모조리 파기하라고 명한다. 철종 집안이 역모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철종이 왕이 되기 전 행적과 집안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831년생이니 그가 왕위에 오를 때는 19살이었다. 철종은 왕이 되어서도 직접 나라를 다스릴 수도 없었고 안동 김씨 일가도 그의 정치를 원하지 않았다. 순원왕후가 수렴 정치를 했다. 3년후 통치권을 받는다.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해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삼정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어려운 백성을 구하려는 빈민구호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1860년 최제우의 동학이 탄생해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된다.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고 삼정 문란으로 1862년 진주민란 등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해 민란의 시대가 된다.

철종은 사팔뜨기였다고 한다. 철종 12년(1861) 도화서에서 그린 ‘철종 어진’(보물 1492호)은 군복을 입은 유일한 조선 임금의 초상화다. 철종어진에서 오른쪽 눈은 정면을, 왼쪽 눈은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 높은 권위의 초상화인 어진인데도 화가들은 기어코 사시로 묘사한 것이 이채롭다. 철종 12년(1861) 도화서에서 그린 것으로 조선 어진 중 유일한 군복차림이다. “이마가 각지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두 광대뼈에서는 귀밑털이 덮여있다. 귀의 가장자리는 넓고 둥글었으며 입술은 두꺼웠고 손이 컸다”는 기록이 있다

일부에서는 그가 세도정치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혼군(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으로만 평가하는 것도 맞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군사들 몰려오자 도망쳤던 ‘강화도령’… 사랑하는 여인과 생이별

철종 어진

조정에서 강화도로 이원범을 모시러 가고 한양으로 올라오는 장면이 드라마에 많이 등장한다. '강화도령'을 왕으로 모셔 가기 위해 많은 관리들과 군사들이 배를 타고 강화도로 넘어오고 있었다. 초가에서 이를 지켜본 '강화도령'은 자신을 잡으러 온 군사인 줄 알고 인근 산으로 줄행랑쳤다고 한다. 영의정 정원용은 왕이 될 인물의 이름도 모르고 강화도로 갔다. 이원범은 조정 대신들이 찾아와 교지를 내릴 때 부들부들 떨며 살려달라고 했다. 이원범이 김포를 지날 때 사랑했던 여자를 보고 싶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나중 궁궐에서 그 여인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술과 여색에 빠졌다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임금님의 첫 사랑’으로 영화나 TV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화도령’(1963), ‘임금님의 첫사랑’(1967) 등 1960년대 제작된 철종 관련 영화에서 강화도령이 왕위에 올라 궁중 예법을 배우고 강화 시절 사귄 처녀를 궁궐로 몰래 불러들이는 장면이 부각되기도 했다.

강화도에는 철종의 생가가 용흥궁이 단장되어 있다. 용흥궁으로 불리고 있지만 원래는 보잘것없는 초가였다. 철종이 왕이 된 뒤 4년 만에 강화 유수 정기세가 지금과 같은 작은 궁으로 지었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잠저를 알리는 비각이 있다. 용흥궁은 현재 강화시내에 있으며 인근에 성공회대성당이 있다.

◆사도세자가 철종의 증조 할아버지

합정동 천주교 순교자 설명 은언군

이원범은 왕족이기는 했지만 역적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는 사도세자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다. 은언군은 1779년(정조 3년) 장남 상계군 역모 사건이 발각되면서 강화도로 유배됐고 1801년(순조 1년) 그의 부인 송 씨와 며느리 신 씨(상계군의 처)가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으면서 함께 사약을 받았다. 은언군 서자였던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1785~1841)도 부모와 형·형수의 죄에 연좌돼 강화부 교동으로 쫓겨났다가 이곳에서 사망했다. 이때 이원범의 나이는 11세였다.

이원범 집안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5세가 되던 1844년(헌종 10) 맏형인 회평군(1827~1844)이 또 다시 역모에 연루돼 사사되면서 서울에 살던 이원범은 작은형, 사촌과 함께 강화도로 쫓겨 왔다. 그리고 4년 뒤 이원범은 사약을 든 금부도사 대신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을 왕으로 모시는 봉영 행렬을 맞았다. 서울 바깥에 살던 왕족이, 그것도 역모에 몰려 유배에 처한 죄인이 왕에 등극한 것은 고려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두 기자  ld@1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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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수 2018-07-06 00:29:00

    임금님의 첫사랑은 1976년에 동양방송 일일드라마였습니다. 김세윤씨가 철종역이었고 사미자씨가 여주인공 어머니, 박병호씨가 스님으로 나왔죠. 여주인공은 이미 고인이 되셨는데 이름이 생각나질 않네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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