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 세도정치 60년, 조선은 병들어갔다

서울 합정동 절두산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19세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천주교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 속에 파고들었다.

19세기를 여는 1800년 조선에서는 왕이 교체된다. 조선의 부흥기를 이끈 정조가 승하하고 정조와 후궁(수빈박씨) 사이에 태어난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다. 정조는 승하하면서 순조의 장인이자 사돈인 김조순에게 뒷일을 맡긴다. 이때부터 1863년 고종이 왕이 돼 대원군이 권력을 행사하기까지 60여년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펼쳐진다. 이 기간 조선은 완전히 병들어갔다.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천주교가 정치 소외 세력과 살기 힘든 백성들 사이에 급속히 퍼졌다. 1860년에는 동학이 창시된다. 한반도 바다에서는 서양배의 출몰이 잇따랐다. 1811년 조선통신사가 마지막으로 일본에 간다. 에도까지도 가지 못하고 대마도에 머무르다 귀국한다. 이후 일본과의 교린 관계는 사실상 끊긴다.

◆안동 김씨 60년 정치 시작

정조와 사돈을 맺은 김조순의 등장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틀이 마련된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온정적이던 노론 명문가 김조순에 마음을 주고 사돈으로 삼는다. 김조순은 1785년 문과에 급제했다. 정조는 김조순의 원래 이름인 낙순을 조순으로 바꾸어 내리고 ‘풍고’라는 호까지 지어주며 관심을 보였다.

순조가 즉위하자 궁궐의 가장 큰 어른인 정순왕후(15세의 어린 나이에 66세의 영조와 결혼해 계비로 들어온 인물)가 수렴 청정한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노론의 입장이었기에 정조의 정책을 뒤집는다.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혁파하고 규장각(개혁정치 진원지)을 축소해 정조의 개혁정치가 후퇴한다. 1805년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순조 아내인 순원왕후를 구심점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본격화된다. 김조순은 반남박씨 경주김씨 풍양 조씨 등과 한때 연합정권을 세우나 결국 안동 김씨 일가로 정국을 이끌어 간다. 1815년 순조는 성인이 되자 지방에 암행어사 파견 등 왕권 강화 노력을 했다.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1809~1830)에 정치 실무를 맡기기도 했다. 효명세자 부인은 풍양 조씨 딸인 신정왕후로 훗날 대원군과 밀약해 고종을 등극시키는 인물이다. 효명세자는 창덕궁 후원에 연경당 건립 등 왕권 강화 노력을 취했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세도 정치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는 없어졌다. 권력 편중과 남용, 외척의 발호, 관료 체제 붕괴, 경제 질서 파탄을 가져왔다. 지방에서는 아전 토호들의 발호가 극심했고 서원과 향교를 근거를 둔 유림도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며 백성을 괴롭혔다. 삼정문란으로 각지서 농민 반란이 잇따른다. 1862년에만 전국서 35회 민란이 일어난다. 정부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해 대책을 세우나 효과가 없었다.

◆천주교, 1800년대 조선을 흔들다

조선의 천주교는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에 의해 처음 소개됐다. 당시는 종교라기보다 새로운 서양 문물의 차원이었다. 18세기 후반 영조 말엽부터 천주교는 종교화 되고 일부 실학자들은 신앙 운동에 앞장선다. 18세기 후반 천주교는 학자들 사이에 본격 퍼져나갔으며 19세기 들어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된다.

1785년 조선은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린다. 이른바 천주교 포교 금지령이다.

1787년 조정에서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 폐해가 논의될 정도로 천주교는 이미 널리 퍼져있었다. 1791년에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진산사건 또는 신해박해가 일어난다. 1799년 신자수가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한다. 1801년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권철신 이승훈 이가환 등 300명이 처형되는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는 정순대비(노론벽파)는 정치적 반대파인 남인제거 차원에서 천주교를 탄압했다. 한강 새남터에서 주문모가 참형(최초의 외국인 순교자)을 당하고 왕실인 은언군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도 목숨을 잃었다.

탄압에도 천주교는 꾸준히 백성들 속으로 파고든다.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가 탄생한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조선 교인들의 요청에 따라 조선교구를 베이징교구에 독립시킨다. 파리외국(외방)전도회에서 조선 교구를 지원토록 지시한다.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임명됐지만 조선에 부임하지는 않는다. 파리외국전도회는 1836년 신부 모방, 1837년 신부 샤스탕, 1838년 주교 앵베르를 파견한다. 김대건(1821~1846)은 5년간 마카오 포르투갈 신학교에 머물면서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등 6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천재성을 보이며 1845년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된다. 그는 귀국해 몰래 활동을 벌이다 체포된다. 불과 25세의 나이에 순교한다.

마침내 1860년대 들어 조선은 서양과 무력 충돌을 하게 된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혹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다. 그해 1월 프랑스 선교사 등 수많은 천주교도를 처형하는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프랑스 함대가 한강까지 침투하고 강화도를 점령, 약탈해 조선군과 전투을 벌이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1868년에는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묘를 도굴하다 실패하고 1871년에는 미국 군함이 강화도까지 와 무력 충돌을 벌이는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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