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 복원 등 율곡마을 조성… 자운서원·화석정등 유적지 많아

파주시가 파평면 율곡리 일대에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1의 생가를 복원하는 등 율곡마을을 만든다고 한다. 이이는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며 여섯 살 때쯤 파주로 와 생활했다. 이이의 호인 율곡은 그가 자라난 파주 파평면 율곡리에서 따왔다. 율곡리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한 곳이다.

◆ 조선 대표적인 성리학자

이이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 실시, 사창 설치 등 사회 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안을 제시했다. 1564년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모두 아홉 차례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으며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ㆍ 병조ㆍ이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했다. 조선 유학계에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다. 당쟁을 조정했으며 10만 대군의 양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중용토석'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세 살때 이미 글을 읽었고 8세 때인 1543년 ‘화석정시’와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었다. 1548년(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경상북도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론에 관해 토론하기도 했다.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했다. 과거 시험에서 율곡이 지은 ‘천도책’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하게 만들었다.

이이는 선조에게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되 군사에게는 호별세를 면해주고 무술을 단련시키며 6개월 만에 교대로 서울을 지키도록 하다가 변란이 일어날 때는 10만 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는 등 위급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만언봉사에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왕도이며 인정이다."라고 하면서 "임금은 나라에 의거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거한다. 백관을 창설하고 여러 직책으로 가른 것은 오직 민생을 위해서다."라고 하여 민본정치를 추구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봉건적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개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율곡은 당시의 보수적 집권층과는 달리 시대의 상황에 따른 법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제도라도 오래 지나면 폐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조정의 성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이이의 어머니로 한국의 대표적 여성상인 신사임당(1504∼1551)은 강릉에서 태어났다. 결혼후 시댁의 오랜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하며 이이를 키웠다. 사임당은 어려서 경전(經典)에 능통하였으며, 7세 때 이미 산수도(山水圖), 포도도(葡萄圖)를 그렸는데,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교함을 발휘하는 그의 화풍은 따를 자가 없었고, 필법(筆法)도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이자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남편을 잘 보필한 아내로서, 그리고 교양과 학문을 갖추고 천부적 소질을 발휘한 예술가로서 우리나라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다.

파주에는 이이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내에는 가족 묘역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이 자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가족 묘역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 노씨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이 중심묘역을 이루며 그 외의 가족묘 등 모두 14기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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