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3대 항쟁지… 화성 오산 의왕 등으로 불길처럼 번져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수원 3.1운동.

내년이면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다. 수원에서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최근 출범했다.

수원은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과 더불어 3.1운동의 3대 항쟁지로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일 방화수류정 부근에서 시작된 수원의 3.1운동은 종교계, 농민, 상인, 학생, 노동자, 기생 등 모든 계층이 참여한 시민 저항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 조국 독립의 의지는 전국의 '대한독립만세'로 터져 나왔다. 일제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식민통치는 조선인들의 생존권 위협으로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간의 차별과 수탈이 전국적인 만세 운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수원의 3․1운동은 서울과 개성의 만세운동과 같은 날인 3월 1일 일어났다. 화홍문 방화수류정 아래에 수백 명의 학생과 주민들이 모여 '대한독립'의 기치를 세운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천도교도, 기독교도, 유학자, 그리고 농민, 학생, 상인과 기생까지 전 계층이 참여했다.

수원은 전국에서 조직적이고 격렬한 투쟁 양상을 보인 대표적인 만세운동의 항쟁지다. 산발적이고 평화적인 시위도 있었으나,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고 갖은 악행을 저지른 순사들을 처단했다. 만세운동의 격렬한 전개에 당황한 일제는 폭력적 진압을 자행,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3월 1일 방화수류정의 만세를 시작으로 3월 16일 수원면 장날에는 팔달산 서장대와 연무대에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면서 종로 시가지를 통과했다. 3월 23일은 수원역 부근의 서호(西湖)에서 700명이 만세운동을 벌이며 일본 경찰과 헌병대 및 소방대와 충돌했다. 3월 25일은 장날을 이용해 청년학생의 주도로 약 20명의 학생과 노동자가 수원면내의 시장에서 만세를 불렀다. 3월 29일은 기생 30여 명이 건강검사를 받으러 가던 도중 자혜의원(慈惠醫院, 현 화성행궁 봉수당 자리)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일제의 총칼에 저항했다. 자혜의원 앞에는 수원경찰서가 있어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차고 근무하고 있었으나, 수원기생들은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이 소식을 접한 상인과 노동자도 야간에 합세,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며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고 창유리 등을 파괴했다. 만세운동은 화성을 중심으로 한 수원면내 외에도 동탄면, 성호면(현 오산시), 양감면, 태장면, 안룡면, 의왕면, 반월면, 비봉면, 마도면 등 전 지역에서 장터와 산상(山上)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타올랐다.

송산면(松山面) 주민들은 3월 28일 오후 2시경 송산면사무소 뒷산 및 그 부근에서 10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마침 송산면사무소에 출장 왔다 만세운동에 놀라 도망치는 악질 순사부장 노구찌(野口廣三)를 쫓아가 돌과 몽둥이로 때려 그 자리에서 처단하기도 했다.

향남면(鄕南面) 발안에서는 3월 31일 1000여 명의 천도교인, 기독교인, 농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연설과 행진을 하는 중에는 길가의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거나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질렀는데,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더욱 힘차게 만세를 불렀다.

발안장터의 만세운동은 4월 3일의 우정면(雨汀面)과 장안면(長安面)의 연합시위로 이어졌다. 이때 2500여 명의 지역민들이 모여 장안면사무소,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그곳에 비치된 식민 행정의 장부와 서류 등을 불태웠다. 군중은 다시 화수경찰관주재소로 향하여 대한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며 그곳에 근무하던 순사 가와바다(川端豊太郞)를 처단했다.

주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강한 반일감정과 피해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소작농 처지에서 일제의 간척공사에 강제로 동원되거나, 일본인 경영공사에 고용되어 갖가지 착취와 폭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수원지역 최대의 만세운동으로 가장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운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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