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지배권 다투던 군사 요충지, 한국전쟁 전투 치열

 

파주 감악산은 전국에서 인기있는 명산이다. 특히 출렁다리를 개장한 2016년 9월부터 올해 1월 7일까지 1년 4개월 동안 감악산을 찾은 방문객은 103만5570명에 달한다. 감악산은 오래전부터 명산일만큼 역사에도 각종 기록이 있다. 감악산은 해발 675m 높이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영험한 곳으로 내내 꼽힌다.

"(조선에서 이름난 산으로) 동쪽엔 치악산이요, 남쪽으로는 계룡산과 죽령산과 우불산과 주흘산과 금성산이며, 중부엔 목멱산(지금의 서울 남산)이며, 서쪽으로는 오관산과 우이산이고, 북쪽으로는 감악산과 의관령이 있다."

조선 후기 학자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지금의 경기 파주 적성면에 있는 감악산은 조선 시대에 신성시된 산악 중 한 곳이었음을 엿보게 된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듬해인 태조 2년(1393) 1월 21일에 감악산을 지키는 성황신을 호국백(護國伯)으로 책봉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감악산은 철마다, 혹은 가뭄과 같은 국가적 재난이 있을 때 제물을 받는 신으로 당당히 대접받았다.

예로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해서 감악(紺岳)이란 이름을 얻었다. 산 전체가 거대한 돌덩이라 신성성이 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사보호시설로 묶여서 일반에 개방된 지는 오래되지 않는다.

감악산은 예로부터 임진강을 낀 남과 북의 교통 요충지이자 삼국시대 이래로 한반도 지배권을 다투던 군사 요충지였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북서쪽은 파주시 적성면, 북동쪽은 연천군 전곡읍, 남동쪽은 양주시 남면 등 3곳에 걸쳐 있다. 이 지역은 국경 분쟁이 심하던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영토 싸움의 현장이었다.

감악산에서 북서쪽 방면으로 임진강을 향해 조금만 달리면 중성산이란 야트막한 산이 나타난다. 해발 150여m도 채 안 되는 그곳에 쟁투 현장의 한복판을 차지하는 고대 성곽 칠중성(七重城)이 있다. 군사 전략상 얼마나 중요했으면 성벽을 일곱 겹으로 쌓았겠는가.

고구려 영류왕 12년, 신라 진평왕 51년(629) 8월에 벌어진 양국 전쟁에서 김유신이 혁혁한 공을 세워 처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낭비성(娘臂城)이 바로 이 칠중성이라는 학계 견해가 많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감악산신의 감호를 받고는 출세 가도를 달린 셈이다.

감악산은 험준해 산성을 쌓기 곤란했다. 대신 인접 지점이자 임진강 도강의 길목이 되는 중성산에다가 군사요새를 건설한 것이다.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영국군의 글로스터시(市) 출신 부대원들이 처절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당시 글로스터 연대 1대대와 왕립 제170 박격포대 소대 용사들은 설마리 235고지에서 수도 서울을 함락하기 위해 진격해 오는 중공군 주력 63군 3개 사단을 맞았다. 사흘 밤낮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공세를 차단했고, 그동안 한국군과 유엔군은 안전하게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산 정상에는 삼국시대 고비(古碑)가 있다. 높이 170㎝인 이 비석은 일명 '빗돌 대왕비' 또는 '설인귀비'라고도 한다. 그런데 비석엔 글자가 없다. 애초에 없었는지, 아니면 차츰 마모돼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조선 후기 정계 거물이자 당대 제일의 명필인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이 현장을 답사하고 남긴 글을 보면 그때도 비석엔 글자가 없었다.

"(1666년) 9월29일…(송상사<宋上舍>)라는 분과 함께) 감악산을 유람하니, 저녁엔 견불사(見佛寺)에서 밤을 새고 새벽에 깎아지른 벼랑 정상에 올라 신정(神井·우물 이름)에서 물을 마셨다. 그 위가 감악사(紺嶽祠)다. 돌로 쌓은 단이 세 길인데, 단 위에는 산비(山碑)가 있으니, 오래되어 글자가 없어졌다. 옆에는 설인귀(薛仁貴) 사당이 있는데 왕신사(王神祠)라고도 한다. (삿된 귀신을 제사하는 사당인) 음사(淫祠)인데, 그 신이 요망하게 화복(禍福)을 내릴 수 있다 해서 제사를 받고 있다."

감악산 정상에 선 옛 비석은 지금도 허목이 말한 상태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비석은 전체 생김새라든가, 그 받침돌 모양이 북한산 비봉과 마운령, 황초령에서 각기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렇다면 왜 비석에 글자가 없을까. 아예 처음부터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보통 비석은 미리 주문 제작에 들어간다. 이 비석 역시 진흥왕이 언제 감악산에 행차한다는 계획에 따라 제작에 들어가 그 행사 장소인 감악산 정상에 제반 준비를 하고 미리 세워놨을지도 모른다. 왕이 다녀가고, 모종의 행사를 치른 다음에 비석에다가 그 내용을 새길 예정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겨 왕이 행차하지 못하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못한 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덩그러니 남게 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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