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격전지·군사지역으로 오랫동안 일반인 접근 쉽지 않아

(연합뉴스 제공)

민간인통제선 내 임진강의 비경을 자유로이 조망할 수 있는 독개다리 스카이워크인 ‘내일의 기적소리’가 개장 1년 만에 방문객 20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과거 6.25격전지에서 임진강 일대의 빼어난 풍광을 감상하노라면 어떠한 생각이 들까. 한강의 기적의 상징이라면 임진강은 분단의 상징이다. 임진강은 남과 북의 경계선 역할을 하면서 흐르는 아름다운 강이지만 서부지역 민통선과 흐름을 같이해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임진강은 민간인통제구역으로 허가없이 들어가 볼 수 없으며 유적지인 반구정(황희선생유적지)이나 화석정에서 조망할 수 있다.

임진강은 역사적으로 보면 가까이 6.25전쟁,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지형적 특성 때문에 각국의 세력 다툼의 공간이었다. 예로부터 신라·백제·고구려의 국경으로 분쟁이 잦았던 지역이다. 수많은 세력 다툼 속에 말없이 희생된 민초들의 눈물이 함께 흐르는 슬픈 강이기도 하다. 강원도 안변을 원류로 영풍을 거쳐 연천에 이르러 포천과 합류해 서쪽으로 길게 흐른 뒤 한강과 합류한다.

수상교통의 요지로 6·25전쟁 이전에는 고랑포까지 배가 다녔고, 작은 배는 안협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임진강 남북을 잇는 다리는 6.25 전쟁 때문에 모두 파괴되고 하나 남았다. 자유의 다리였다. 현재는 통일대교와 임진강 철교를 위시하여 여러 다리가 건설되어 있다.

임진강은 고구려 때 당시 표로하로 호칭되었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 당시 공양왕이 송도에서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시고 몰래 빠져나와 고랑포에서 돛배를 타고 상류로 도망을 가다 구미연에 이르러 배가 파산하여 신주와 배는 강물에 가라앉았고 왕은 구사일생 강 언덕으로 기어 나왔다. 후에 왕은 원주 지방으로 도망을 가다 결국 간성에서 피살되었다. 이곳에서 신주를 빠뜨렸다 하여 신지강(神智江) 또는 구미연(龜尾淵), 구연(仇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있다.

신지강의 맑고 맑은 물은 양면에 푸른 돌이 암벽으로 수십리를 거쳐 둘러 싸여 그림과 같이 아름다워 고려 태조가 자주 찾아 궁중악으로 선유하였던 곳이라 한다. 또한 공민왕이 장단에 나가 대장군 이화(李和)에게 명하여 공인을 시켜 연천군 주월리(舟月里) 산언덕에 정자를 건립케 하고 정자의 이름을 강선정(降仙亭)이라 하였다.

율곡 이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에 있는 정자인 화석정에 틈이 날 때마다 들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랑 기둥을 닦도록 하였다.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그믐밤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폭풍우가 너무 심해 한치 앞을 볼 수 없었다. 이 때 호종하던 이항복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관솔이 타듯 불길이 올라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1593년 환도하면서 이 강에 당도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순국한 병사들의 넋을 달래고자 나루터 강변 모래사장에 제물을 차려 놓고 위령제를 지내게 된다. 의주파천 당시 4월 그믐밤 폭풍우 속 노심초사 고생 끝에 이 나루를 건너게 된 쓰라린 아픔과 이 강을 지키고자 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용감한 충신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가운데 선조가 통곡하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 나루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였다”하여 신지강(神智江)이 임진강(臨津江)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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