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발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조무제 전 대법관이 부산법원 조정위원장직을 3개월 전에 조용히 사퇴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새삼 그의 청빈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조정위원장직을 맡아온 조 전 대법관은 지난 5월 말 마지막 조정 2건을 처리한 뒤 별도의 퇴임식 없이 물러났다고 한다. 

법원장이 자리에 있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후배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다"며 끝내 고사했다는 것이다. 

퇴임식이나 환송회를 하지 말것은 물론, 법원내에 자신의 사퇴 사실조차 알리지 말라는 특별한 요청과 함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부산법원의 많은 후배 판사들은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고 아쉬워 하면서도 `역시 조무제'라며 그의 아름다운 퇴임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수당과 교통비 정도만 받는 명예직인 조정위원장직 사퇴가 대단한 화젯거리가 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당사자가 조 전 대법관이기에 눈과 귀가 쏠리는 것이다. 

그는 2004년 대법관직을 물러날 당시 유명 법무법인들이 수십억원씩을 제시하면서 모셔가려 했지만 "후배들에게 부담이 될수 있는 변호사 개업은 안할 것"이라며 모교인 동아대 석좌교수행을 택해 화제가 됐었다. 

누구도 문제삼지 않을 부(富)를 초연히 버리고 교단을 택한 그의 선택은 법조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그는 1993년 공직자 첫 재산공개 때 82㎡형 아파트 한 채와 부친 명의 예금 등 6434만원을 신고했었다. 

신고 대상 고위 법관 103명 중 가장 적었다. 

또 대법관 시절에는 전세 보증금 2000만원의 원룸에 거주했고, 퇴임후 부산지법 민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으로 5년간 재직할 동안에는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점심은 센터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는 청빈의 삶을 실천했다.

뿐만 아니다.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근 20여년 동안 모교에 매달 50만원씩을 장학기금으로 기부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고, 지난해 8월에는 학교 수업등으로 다른 조정위원에 비해 하는 일이 적은데 수당은 비슷하다며 자진해서 본인의 수당을 절반으로 삭감해 달라고 요청해 법원측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누구도 범접키 어려운 청빈한 삶을 살았지만 실력 또한 탁월했다고 한다. 

그를 아는 법관들은 그의 청빈함 때문에 실력이 가려져 있는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소장 법관시절부터 `장래 대법관감'이라는 평판을 들어온 그는 1988년 `부산판례연구회'를 만들어 수준높은 법률이론으로 부산 법조계의 자부심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비서울대 출신에 영남지역에서만 근무를 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재판'과 `존경받는 향판(鄕判'이라는 평가를 받아 대법관까지 올랐던 그다. 

우리 공직사회는 지난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도 드러났듯이 만연한 부정부패로 인해 `관피아', `법피아', `정피아' 등의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다. 

특히 법조인 출신 고위 공직자들의 전관예우 문제는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돼 있는 지경이다. 

그 와중에 조 전 대법관의 소탈하고 청빈한 행보는 황금만능, 배금주의에 찌들어 있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그는 10년전 대법관 퇴임식때 "이해관계에 얽힌 주변으로부터 초연하려면 고독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법관은 고독을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이 시대의 고위 법조인들 나아가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몇명이나 그의 이 말에 공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지금도 스스로 퇴임식에서 한 말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고 고독함 속에서 청빈을 실천하고 있는 그가 오래도록 이 시대의 딸깍발이로 남아 우리 사회의 귀감이 돼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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