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원래 북쪽에서 공동경비구역과 연결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 가운데로 남북 경계가 나뉜다. 북측이 판문점으로 이동하는 유일한 교량이었다. 1976년 8월 이전까지는 공동경비구역 내의 남북 통행이 가능했다.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이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도끼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경비병 9명에게 부상을 입혔던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다. 유엔 측은 공동경비구역 내에도 군사분계선을 긋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통행을 차단했다.

다리가 폐쇄되자 북한군은 보급품 전달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기존 다리보다 조금 위쪽에 새 교량을 급하게 만들었다. 72시간 만에 콘크리트 다리를 완공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 ‘72시간 다리’다. 이 다리는 주로 북쪽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오고 가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이번에 귀순용사가 차를 몰고 넘어온 다리이기도 하다.

1953년 7월27일 유엔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포로를 교환했다. 양쪽 포로들은 남쪽과 북쪽으로 송환되면서 일단 이 다리만 건너면 누구도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해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남쪽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다.

1968년 1월 북한 해안 인근 공해 상에서 북한에 납치된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2명은 이 다리를 통해 같은 해 12월 송환됐다. 남북 적십자회담 수석대표들도 이 다리를 이용해 평양에 다녀왔다. 1959년 옛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평양지국 기자 이동준을 비롯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모티브가 된 변용관 상위(대위) 등이 이곳을 통해 넘어왔다. 1980년대엔 공산권 국가의 중립국감독위원회와 북측 정전위원회 소속 군인들이 잇달아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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