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데 군사분계선… 남북이 마주보며 대치

북한 지프차가 논밭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쏜살같이 달리며 남쪽으로 내려온다. 전조등을 켜고 북한의 ‘72시간 다리’를 건너고 ‘김일성 친필비’를 지나 군사분계선쪽으로 질주한다. 잠시후 우회전하더니 지프차의 바퀴가 배수로에 빠진다. 몇 차례 시동을 걸었으나 실패한다. 곧바로 북한군들이 정신없이 달려간다. 지프차에 있던 북한 병사는 차에서 내려 남쪽으로 달린다. 북한군 3명이 도망가는 병사를 겨누고 사격했으며 다른 한명은 엎드려서 사격을 시작한다. 귀순 병사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이 병사는 5~6발을 맞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에서 쓰러진다. 이 병사를 쫓던 북한군 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다가 이를 알고 쏜살같이 북쪽으로 다시 넘어간다. 우리 군이 쓰러진 귀순 병사를 발견하고 포복으로 접근해 극적으로 구출한다.

지난 2017년 11월 13일 오후 3시10분쯤부터 4시까지 JSA(공동경비구역) 일대에서 벌어진 북한병사의 귀순은 첩보전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실감나는 광경이었다. JSA(공동경비구역)를 통한 북한 병사의 귀순 장면이 얼마전 동영상으로 공개됐다.

자유를 향한 북한 병사의 귀순은 그야말로 ‘기적의 탈출’이었다. 북한 병사의 귀순으로 공동경비구역이 다시 주목받았다. 공동경비구역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판문점(板門店)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판문점은 서울에서 북북서쪽으로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소재한 지역이다. 행정구역상 지명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이다. 그러나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고 있는 특수지역이다.

오늘날의 판문점은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측과 공산(북한·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196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 군사분계선상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공동경비구역을 말한다.

공동경비구역 설치 이후 쌍방 군정위 관계자들은 구역내에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 이후 군사분계선(MDL)을 사이에 두어 남북이 분할경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다.

판문점은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예비접촉을 필두로 남북간의 각종 남북회담이 개최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판문점의 원래 지명은 ‘널문리’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신하던 선조가 강을 건너려다 다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자, 마을 사람들이 대문짝 등 판자(널)로 임시 다리를 놓아 건너게 한 뒤 그렇게 불렸다. 1951년 10월 정전회담이 개성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회담 참석의 한쪽인 중국어 표기를 위해서 판문점으로 고쳐쓰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6·25 전쟁의 휴전회담 장소로 중립적인 위치를 물색하던 유엔 측이 이곳을 회담장으로 제안했다. 이후 휴전회담은 이곳의 작은 주막집인 ‘널문리가게’ 앞의 콩밭 천막에서 진행됐다. 이때 ‘널문리가게’를 한자로 표기한 ‘판문점’이 공식 지명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서쪽의 작은 강 사천(砂川·모래내)에 널문다리가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이 다리를 통해 포로 송환이 이뤄졌다. 당시 포로들이 한 번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뜻에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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