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초 유점사의 안골 비취동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박가 성을 가진 한 처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무예도 통달하고 신묘한 도술도 닦은 사람이었다. 당시 왕정 안에서는 양반 통치 배들이 서로 더 많은 권리를 차지하려고 당파싸움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편을 잘 아는 그는 나라의 운명에 대하여 근심을 하면서도 벼슬할 생각은 아예 그만두고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벗 삼아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박 처사는 두 딸을 데리고 살았는데 세월이 흘러 그들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둘째딸은 인물이 잘 생겨서 먼저 시집을 보냈으나 맏딸 박 소저는 인물이 박색이라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맏딸은 천성이 어질고 아버지에게서 배운 도술과 학문이 또한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원래 그는 하늘세계에 있다가 죄를 짓고 금강산에 내려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는데(즉 하늘이 그더러 박 처사의 딸로 태어나게 하여)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액운을 면치 못하게 된 까닭에 흉한 허물을 쓰고 살게 되어있었다. 이것을 아는 아버지 박 처사는 그를 무등 귀여워하면서 자기의 모든 재간과 지혜를 전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팔청춘이 다 되었으니 어쨌든 빨리 배필을 구해주어야만 하였다.

한편 당시 서울 안국방에는 이득춘 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글 잘 짓기로 이름이 있어 과거에 급제한 후 홍문관 부제학까지 지냈다. 그런데 나이 40이 지나도록 슬하에 한점 혈육이 없어서 늘 근심이었다.

그들 부부는 명산대천을 다 찾아다니면서 자식을 보게 해주기를 빌었는데, 얼마후 태기가 있어 열 달 만에 옥동자를 낳았는데 이때 난데없이 상서로운 기운이 온 집안을 휘감더니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갓난아기를 깨끗이 씻어주고서 "이 아기는 원래 하늘의 태백성으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왔으니 귀히 기르소서. 아기의 배필은 금강산에 있으니 하늘의 뜻을 어기지 말고 때가 되면 그 사람을 찾아 혼례를 치르소서." 하더니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씨 부부는 크게 기뻐하여 아이 이름을 시백이라 짓고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웠다.

세월이 흘러 시백의 나이 열여섯 살이 된 해에 득춘은 강원도 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시백을 데리고 감영이 있는 원주로 갔다. 어느 날 금강산 박 처사는 감사의 아들이 총명하다는 말을 듣고 청혼하려고 행장을 갖추어 길을 떠났다.

강원감영에 도착한 그는 곧 만나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득춘이 만나보니 비록 칡베 옷을 입었으나 신선 같은 풍채를 가진 훌륭한 인물이라 그를 선생이라고 부르며 정중히 대하였다. 처사는 수인사를 한 다음 곧바로 말을 꺼내었다.

"저의 어리석은 궁리로 헤아려본 즉 댁의 아드님과 저의 딸자식은 하늘이 정한 배필이온데 딸자식의 용모가 박색인 것이 부끄럽기는 하오나 감히 이런 사연을 아뢰는 바이옵니다"감사는 아들이 태어날 때 선녀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 흔연히 대답하였다.

"높은 뜻을 알았소이다. 미거한 자식을 따님의 배필로 삼겠다 하니 삼가 선생의 말씀을 좇을까 하나이다."

감사는 곧 아들 시백을 불러 인사를 시키고 성례할 날을 이듬해 8월 20일(음력)로 정했다.얼마후 이시백과 박 소저는 혼례를 치렀다.

그런데 밤이 되어 신부의 방에 들어간 신랑은 그만 아연실색하였다. 키가 7척이나 되고 허리는 한 아름이 넘었으며 코는 우뚝하고 이마는 불거졌으며 눈망울은 너무 커서 보기가 흉한데다가 얼굴빛까지도 까맣다. 너무도 놀란 그는 황급히 뛰쳐나와 아버지가 있는 사랑방으로 달려갔다.

"신방에 들어가 신부를 본 즉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지라 너무 무서워 달려나왔 나이다."

아버지가 이 말을 듣고 "네 아무리 용렬하기로서니 신부의 생김새가 남만 못하다고 부모가 정해준 사람을 마다하는 방자한 짓을 하느냐." 하고 꾸짖었다. 시백이 할 수 없이 신방에 가 구석에 누웠으나 새벽닭이 울자 뛰쳐나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그러나 신랑은 몇 달이 지나도록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외로이 지내게 된 박 소저는 시아버지에게 청하여 후원에 초당을 한 채 짓고 살면서 글도 읽고 도술도 익히었다.

남편인 이시백이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박 소저는 백옥으로 만든 연적이 용으로 변하여 연못 속에 들어갔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연못가에 나가보니 백옥연적이 있었다. 그는 시비인 계화를 시켜 남편에게 그것을 가지고 가서 먹을 갈아 글을 쓰면 장원급제 할 것이라고 전하게 하였다. 

처음에 시백은 과거보는 날에 여인이 무슨 방정맞은 소리를 하느냐고 아니꼽게 생각하였으나 연적을 보니 천하절품이라 마음을 고쳐먹고 품속에 넣어가지고 갔다. 그 연적으로 먹을 갈아 답안을 쓰니 글 생각이 샘솟듯 막힘없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단연 장원급제를 한 그에게는 벼슬길이 탁 트이었다.

그럭저럭 3년 세월이 지나갔다.그 후 그들 사이에는 쌍둥이가 생겼고 시부모들은 손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이시백은 그 사이 평안감사, 병조판서의 요직들을 지냈다.

하루는 병조판서인 남편에게 12월 28일이면 호국군대가 동대문 쪽으로 밀려들 것이니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면 반드시 이길 것 이라고 말하였다. 이시백이 조정에 들어가 국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국왕은 반역자인 간신 김자점의 말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피난가고 말았다.

뒤미처 호국군대가 동대문에 들이닥치니 방비가 허술해진 수도는 끝내 함락되고 말았으며 남한산성도 비겁한 양반들 때문에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은 호국과 화의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박씨 부인은 계화를 시켜 적장 용흘대를 죽여 그의 머리를 전나무에 걸어놓았다. 그의 형 용골대가 화의약조에 따라 조선의 왕자 3명을 데리고 돌아가다가 이것을 보고 동생의 원수를 갚겠다고 달려들었으나 박씨 부인에게서 도술을 배운 계화의 재간을 당해내는 수가 없었다. 그는 혼이 나가서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박씨 부인은 나라의 운수가 그러하니 할 수 없다고 하여 그를 돌려보냈다.

그 후 시백은 아내의 계책을 받아들여 3년 만에 세 왕자를 데려오고 반역자 김자점을 처형한 다음 최고벼슬인 영의정까지 지내면서 나라의 정사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으며 여든 살이 넘도록 살다가 박씨 부인과 함께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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