超人 약포와 어려웠던 壬辰倭亂을 같이 슬기롭게 헤쳐 나가

약포(藥圃)대감의 약관 시절 겸암 선생(謙菴 柳雲龍)은 일찍부터 약포가 장차 국가에 공헌할 큰 인물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아우인 서애 대감(西崖 柳成龍)은 약포보다는 16년이나 손아래이면서도 약포 선생의 인물됨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낌새를 알고 아우에게 약포의 비범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어느 날 저녁 아우인 서애가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는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고평(예천읍)에 있는 약포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 밤까지 돌아 오라 일렀다. 

“형님 그렇게 가는 글씨로 된 편지를 등촉을 아무리 밝혀도 읽기조차 힘들 텐데 그 답장까지 받아 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이십니다.” 하며 서애가 말하니 겸암은 “약포는 밤중에라도 그 편지를 읽어 볼 것이며 답장도 쓸 것일세.” 하며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과연 새벽녘에 고평에 갔던 하인이 약포의 답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에게 겸암은, “약포가 내 편지를 받아 어떻게 하더냐?” 하고 물으니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 방 가운데서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서 줍디다.” 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서애는 약포가 초인(超人)한 인재임을 깨닫고 더욱 친분을 더하여 그 어려웠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같이 손을 잡고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고 한다.

약포(藥圃)가 젊었던 시절 그 맏동서 되는 사람이 아우 동서인 약포의 체소함을 얕잡아 보는 눈치가 있는 것을 안 그들의 장인되는 십독 반충(習讀 潘沖 - 용궁면 덕계리)이라는 분은 본래 지인지감(知人之感)이 있어 둘째 사위인 약포가 큰 그릇임을 알고 있는 터이기 때문에 맏사위에게 약포의 인물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짐짓 모른 체 하고 있다가 하루는 갑자기 두 사위를 불러 앉히고 등잔불을 보고 일곱 자의 시(詩)를 지으라고 하였다. 맏사위가 먼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흰 용이 구슬을 물고 강을 건너온다.(白龍含珠渡江來) 흰 용은 솜으로 된 심지, 구슬은 불꽃, 강은 접시를 상징한다.”

묵묵히 맏동서의 시를 들여다 보고 앉았던 약포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모든 나라의 성안엔 한 나라의 깃발이 꽂혔다.(萬國城中揷漢幟) 모든나라 성안… 기름이 담겨진 접시 속 깃발… 심지에 불이 붙어 펄럭이는 모습” 그윽히 아우동서가 지은 시를 들어다 보던 맏동서는 깜짝 놀랐다.

기름이 담겨진 조그만 접시를 자신은 한 개의 강(江)으로 밖에 못 보는데, 아우동서인 약포는 접시를 천하(天下)로 보는데는 그 도량과 포부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그만 질려버려서 그 다음 부터는 아우동서인 약포를 마음속으로 존경(尊敬)하며 따랐다고 한다.

약포가 체약(體弱)하고 키도 매우 작았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명(明)나라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천자(天子)를 만나러 궁중(宮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초라하게 보일까 염려되어 신을 한 치 정도 높여서 본래의 키보다 크게 하여 천자를 배알했다.

천자 옆에는 명나라 최고의 관상(觀相)을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약포를 보고는 “조선 사신으로 온 저 사람의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재상(宰相) 감인데 아깝구나.” 하였다.

이 말을 귓전으로 엿들은 약포는 그 다음 날 명(明) 나라 궁중에 들어갈 때는 높였던 뒷굽을 다시 낮추어 본래의 키대로 들어갔더니, 어제 그 사람이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과연 조선에서 온 정탁(鄭琢)은 큰 인재임이 틀림없구나” 하더라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약포(藥圃)가 태어나기는 용문면 하금곡리인데, 고평리에 새로 집을 짓고 우물을 팠으나 웬 일인지 아무리 깊게 파도 물이 나기는커녕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애를 쓰다가 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용이 꿩알 만한 돌을 주면서 “이 알을 파던 우물 속에 넣으면 물이 날 것입니다” 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용문면(龍門面) 금당실(金塘室)에 볼일이 생겨서 살던 옛 집터에 들렸더니 뜻밖에도 얼마 전 꿈에서 용이 주던 알처럼 생긴 돌이 눈에 띄었다.

약포는 그 돌을 도포소매에 집어넣고 고평으로 돌아와서 꿈에 용이 시키던 대로 파던 우물에 집어넣으니 이게 웬 일이냐! 그 돌이 우물 밑에 떨어지자 한 방울의 물도 비치지 않던 우물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현재 예천읍 고평2리에 있는 ‘중간샘’이라는 우물이 바로 이 우물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돌은 남아 있어 해마다 한 차례씩 우물을 헹구어 내고 우물 속에 들어 있는 이 돌을 닦아서 고이 우물에 모셔 넣는다고 한다.

약포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냉돌방에서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서애(西崖)가 볼 일이 생겨 약포와 하룻밤 자게 되었다. 한겨울철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방(冷房)에 더구나 이불도 없이 누웠으니 춥기보다는 이가 덜덜 떨려서 한참도 배기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약포는 서애에게 자기와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얼마 후 서애가 누운 자리가 차가워 지자 약포는 또 자리를 바꾸
자고 하였다. 번번히 약포가 누웠던 자리는 따뜻하였다. 이렇게 자리를 세 번씩이나 바꾸어 가며 길고 긴 겨울밤을 이불도 없는 냉방에서 따뜻하게 새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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