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를 끌고 가서 당먹을 갈아서 말의 몸뚱이를 검게 칠해

옛날에 시골 선비 하나가 벼슬자리를 얻을 양으로 한양에 올라와 세도 당당한 정승집 사랑에 머무르고 있었다. 글공부도 할 만큼 했건만 번번히 과거 시험에 낙방을 하자 남들 하는 대로 뇌물을 써보기로 한 것이었다. 사랑방에는 벼슬자리를 엿보는 선비들이 여럿 들락거리는데 그 꼬락서니가 가관이었다. 어떻게든 대감 눈에 뜨이려고 갖은 선물을 바치며 아양을 다 떨고 있었다.

그 시골 선비도 재물을 꽤나 준비해 와서 바친 판인데, 벼슬을 얻기는커녕 정승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들인 돈이 다 허사가 된데다 집에 돌아갈 노자마저 바닥날 판이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뒤늦게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선비는 그만 화가 났다.

‘내 돌아갈 때 가더라도 이렇게 그냥 갈 수야 없지!’

그러면서 무언가 꿍꿍이를 차리는 것이었다.

그때 정승한테는 무척이나 아끼는 좋은 백마가 한 마리 있었다. 어느 날 그 백마가 바깥마당에 매어진 것을 발견한 선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남 몰래 백마를 객사로 끌고 가서는 진한 당먹을 잔뜩 갈아서 말의 몸뚱이를 온통 검게 칠해 놓았다.

다음날 정승댁에서는 야단이 났다. 정승이 출타를 해야 하는데 항상 타고 다니던 백마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다른 말을 대령했지만 길이 들지 않아서 마뜩지 않으니 정승이 당장 백마를 찾아내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흑마로 변해버린 백마를 찾아낼 턱이 없었다.

그럴 즈음에 전라도 선비가 정승 댁으로 흑마를 끌고 가서 말했다.

“이 말이 제법 쓸 만하니, 정승께 바쳐 주시오.”

정승이 그 말을 보더니 생김새가 그럴싸하다며 안장을 지워서 한번 타보았다. 안장이 맞춘 것처럼 딱 맞는데다가 가기도 아주 잘 가고 말귀도 어찌 잘 알아듣는지 편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야 이거 꼭 맞춘 것 같구나. 색깔이 검어서 그렇지 아주 쓸만한걸!”그러더니 그만 인심을 턱 썼다.

“여봐라, 이 말을 누가 바쳤다고? 그자한테 먼 고을 자리 하나 떼어주도록 해라.그렇게 해서 선비는 평안도 한 고을 사또 자리를 얻게 되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나랏일이 그렇게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어떻든 새 원님이 고을에 부임해서 선정을 펼치니 백성들이 명관이 왔다고 칭송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승은 백마를 까맣게 잊고 새로 얻은 흑마를 애지중지 타고 다녔는데, 하루는 그만 일이 나고 말았다. 

선비가 말을 바칠 적에 절대 비를 맞히거나 목욕을 시켜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던 터인데, 뜻하지 않은 소나기가 문제였다. 화창한 여름날 풀밭에서 풀을 뜯기던 마부가 깜빡 조는 사이에 먹구름이 끼면서 소낙비가 주루룩 내렸던 것이다. 깜짝 놀란 마부가 말을 챙겼으나, 이미 일이 터진 뒤였다. 온 몸에서 검은 물이 흐르며 군데군데 흰 점이 드러나니 사고가 나도 단단히 났다.

마부가 울면서 정승한테로 말을 끌고 가서 땅에 털썩 엎드려 사실을 고했다. 정승이 당장이라도 물고를 낼 것처럼 마부와 말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눈이 동그래졌다.

“어허, 저것 봐라. 뭐가 좀 이상하다. 여봐라, 미지근한 물 한 동이 후딱 대령해라.”

마부를 시켜 살살 말 몸뚱이를 씻어내니 먹물이 주룩주룩 씻겨 내리기 시작했다. 다 닦아내고 나니, 옛날 자기 타고 다니던 백마가 분명했다. 정승은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났다.

“어허, 그놈이 감히 나를 속여? 두고 보자 이놈!”

때는 임금보다 정승 세도가 더 당당하던 시절이었다. 정승은 당장 대궐에 들어가더니 임금께 청해서 제 큰아들을 암행어사로 삼았다.

“당장 평안도 고을로 내려가서 그놈을 봉고파직하고 아주 박살을 내거라.”

정승의 큰아들은 어사가 된 기분에 마패를 만지작거리고 거드름까지 짜르르 떨면서 길을 나섰다. 그러니 행색은 거지 차림이되 무엇을 하는 위인인지 아무라도 알아볼 정도였다. 그가 평안도 고을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관가에서 박아놓은 정탐꾼이 어사 행차를 눈치챈 뒤였다.

어사는 고을 관아에 도착하여 호기롭게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에는 뜻밖의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또 이하 육방 관속과 하인들이 모두 삼베로 상복을 해 입고 머리를 푼 채 곡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고, 아이고~”어안이 벙벙해진 어사가 한 관속을 붙들고 물으니 대답이 뜻밖이었다.

“말 마소. 방금 전에 한양 정승께서 급사하셨다는 연락이 이르니 사또께서 은인이 돌아가셨다면서 저리 슬피 곡을 하고 계시다오.”얘기를 듣다 보니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이었다.“아이구, 그 건강하던 분이 갑자기 웬일이람.”

어사는 출두고 뭐고 따져볼 틈도 없이 관아를 뛰어나오더니 머리를 풀어헤치고 떨어진 베옷을 하나 얻어입은 채 부리나케 본가로 달려왔다. 집에 도착하자 통곡을 하면서 대문을 밀고 뛰어들었다.

“아이고 아버지, 어찌 이렇게 가셨단 말씀입니까?”그러자 정승이 방문을 훌쩍 열어젖히면서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놈아, 네가 지금 뭐하는 짓이란 말이냐?”그러자 어사가 눈이 동그래졌다.

“어라, 아버님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이놈아, 죽기는 누가 죽어! 저런 머저리 같은 놈 하고는!”

“아이고 그놈이 나를 속였구나" 그이후 두번 씩이나 속임을 당하자 정승은 포기하지않을 수 없었다.

 "천년 만년 원님 노릇 해먹게 그냥 놔둬라.”그래서 그 시골 선비는 원님 노릇을 평생 원 없이 하고서 잘 먹고 잘 살았다 한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