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여성 서양화가 독립운동가 시인 등 시대의 선각자

시대의 선각자, 여성운동의 선구자 나혜석(1896~1948)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수원의 나혜석 거리에서 지난 13~14일 먹거리 행사가 열렸다.

나혜석은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아지였으며 학교에 들어가서는 명순으로 불렸다. 혜석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일본 도쿄 유학때부터라고 한다. 그는 서울 진명여고 졸업후 도쿄로 유학을 갔으며 독립운동을 해 옥고도 치렀다. 1921년 서울에서 조선인 첫 유화 개인전을 열어 시대를 앞서 나갔다.

시대를 앞서간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일본 유학에서부터 애인의 요절, 독립운동과 옥고, 만주에서의 생활, 세계 일주 여행, 파리에서의 염문과 이혼, 이혼고백서 발표, 위자료 소송, 행려병자, 쓸쓸한 죽음 등이다.

그녀의 부친은 고위관리였다. 한일 강제 병합 전에는 법관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용인과 시흥 군수를 지냈다. 그녀는 1906년 수원 삼일여학교에 입학했고 1910년 진명여학교에 진학했다. 오라버니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사립미술여학교에 입학한다. 실기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이광수와 염상섭 등을 만난다. 나혜석은 ‘폐허’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잠시 귀국하자 부친이 결혼을 강요하며 학비를 지원해주지 않자 여주에서 여학교 선생을 하며 학비를 모은 뒤 복학했다.

1914년 학생 기관지에 ‘여자도 인간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글을 싣기도 했다. 1918년에는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자유연애로 사회와 갈등하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19년 3.1운동을 여성들에게 확산시키려다 잡혀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서양화가의 남편이 되기를 기뻐하고 적극 후원하겠다는 김우영의 약속을 받고 1920년 4월 결혼한다. 1921년 서울서 첫 유화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1926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황금기를 누린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여행길에 나선다. 유럽에서 최린을 만나 예술과 인생을 논한다. 최린과의 관계가 알려져 1930년 이혼하게 되고 최린과의 관계도 깨진다. 1934년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과 봉건적 인습에 지배받는 남성과 조선 사회를 고발하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이혼고백서’를 발표한다. 또 정조란 개인의 선택이지 강요할 것은 아니라며 정조 관념의 해체를 주장한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것과 같이 임의용지로 할 것이요, 결고 마음에 구속 받을 것이 아니다”

그녀는 성적욕망권에 대한 결정권은 본인이 가져야 하며 개인 선택에 맡겨야지 도덕이나 제도로 묶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생활이 어려워 진 그는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한동안 생활하며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건강마저 잃은 그는 힘들 생활을 하다 1948년 세상을 떠난다.

문필가이며 독립운동가이며 여권 운동의 선구자였던 그. 오늘날 여권신장은 그녀가 살았을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살아있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여성상을 어떻게 그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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