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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이야기] 남한산성과 김상헌“죽음으로 나라 지켜야”… 남양주서 남한산성으로
  • 이두 기자
  • 승인 2017.10.12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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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3일 개봉이후 관객이 300만명을 넘어섰다. ‘남한산성’이 주목받는 이유는 낭떠러지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당시 상황이 지금의 한반도 상황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틈에 끼인 한국은 여전히 무엇하나 혼자 결정할 수 없다. 북한이 핵위협 발사 등으로 한반도를 전쟁 상황으로 몰고가도, 중국과 미국, 일본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한반도를 주물럭거려도 한국은 허공에 외치는 말잔치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 항복 후 두 번 자살 시도

1636년 병자호란 때도 그랬다. 청은 조선을 남한산성에 가두어 놓고 스스로 항복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한산성내에서는 죽음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척화파 김상헌(1570~1652)과 일단 목숨을 부지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1586~1647)이 대립했다. 조선의 왕인 인조는 중간에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채 신하들만 채근했다. 이 영화는 전쟁 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서 과연 누구의 선택이 옳은 지를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배우 이병헌이 최명길 역을, 선이 굵은 김윤석이 김상헌 을 맡아 열연했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은 예조판서였다. 오늘날의 문화부나 교육부장관에 해당한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갈 당시 그는 남양주 석실에 있었다. 왕이 남한산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송파나루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간다. 자신을 건네준 늙은 사공이 청군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받겠다고 말하자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그를 없앤다. 얼마 후 사공의 딸이 아버지를 찾으려 남한산성으로 들어온다. 김상헌은 아이를 챙겨 돌본다.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은 목숨을 걸고 주전론을 펼친다. 오랑캐인 청에게 절대로 무릎을 꿇을 수 없으며 죽음으로서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주화파인 최명길은 죽음으로 삶을 지탱하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갈기갈기 찢으며 통곡하며 6일이나 단식했다.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한다.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나와 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김상헌은 노끈과 바지끈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남한산성이 함락된 이후 김상헌은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로 낙향한다. 1039년 그는 청의 군대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중국 심양으로 압송된다. 6년간 감옥 생활을 하며 지조를 지킨다. 시 한수를 남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1645년 심양에서 돌아온 이후 세상을 뜰때까지 8년간 이곳에서 생활한다.

1638년 최명길이 청에 거짓 항복했다는 밀서가 발견돼 최명길도 심양으로 끌려간다. 두 사람은 옆 감옥에서 생활하며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게 된다. 김상헌은 최명길의 본뜻이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고, 최명길은 김상헌의 꼿꼿한 절의에 탄복했다. 김상헌이 최명길을 위한 시를 남긴다.

양대의 우정을 찾고 (從尋兩世好)

백년의 의심을 푼다 (頓釋百年疑)

최명길이 화답했다.

그대 마음 돌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君心如石終難轉)

나의 도는 고리 같아 믿음에 따라 돈다 (吾道如環信所隨)

◆ 척화파의 상징

김상헌은 사후 척화파의 상징이 되었고 청을 정벌해야 한다는 북벌론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1663년 석실서원이 마련되고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숨진 형 김상용과 함께 김상용의 위패가 함께 모셔진다. 이후 석실서원은 안동김씨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기호학파의 정치 사회 학문의 산실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석실서원은 조선 후기를 이끄는 노론의 정치적 당파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특권의 온상으로 변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라진다.

김상헌은 1596년 과거에 합격해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한때 광주부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벼슬길은 순탄치 못했다.

인조실록은 그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람됨이 단정하고 깨끗하며 언동이 절도에 맞고 안팎이 순수하고 늠연해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 범하지 못하였다. 벼슬한 이후 처신이 구차하지 않고 악을 원수처럼 미워해 여러번 배척 당했다. 이해와 화복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김상헌은 남양주 석실에 은거하다 1652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양주에 김상헌의 묘가 있다. 남양주시 와부리 석실마을 산자락은 조선 명당으로 손꼽힌 곳이다. 안동김씨 조상 묘들이 몰려있다. 조선 때는 한강변을 따라 조선 명문가의 마을이 형성됐다. 한강변이 경치가 빼어나고 무엇보다 한강이 교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와부읍 일대는 조선 조정과도 가까워 궁궐의 소식을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지리적 잇점도 있었다.

이두 기자  ld@1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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