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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시 출신들, 명성황후 살해에 절대적 역할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 조선공사 지내며 ‘여우사냥’ 작전
  • 이두 기자
  • 승인 2017.10.10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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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시는 일본 메이지 유신을 탄생시킨 곳이다. 섬이면서 해안가여서 강화도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하기에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쏟아졌다. 특히 조선을 유린한 인물들이 적지않다. 하기시 출신 중 잊지말아야 할 인물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와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6~1926)다. 이들은 명성황후 시해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 주재 공사를 이어받으며 ‘여우사냥’ 작전을 짜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특히 이노우에는 오랜 동안 외무상을 맡으며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등 조선의 주요 사건에 모두 개입했다.

◆강화도 조약 부대표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절친이다. 강화도 조약 당시 일본 부대표로 참석했다. 외무대신까지 지내고도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로 스스로 격을 낮춰 조선공사로 부임했다. 공사 기간은 1894년 10월 15일부터 1895년 8월 17일까지다. 임기가 끝나도 일본으로 바로 귀환하지 않고 후임인 미우라와 함께 명성황후를 시해를 논의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크게 간여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때는 부대표였다. 강화도에서 한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조선대표 신헌 전권대신이 쓴 ‘심행일기’를 보면 일본인의 발언과 행동들이 나온다. 대부분이 이노우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도에 도착한 일본대표단은 군대를 앞장세워 상륙했다. 그리고 회담장 주변에서 훈련을 하며 협박 분위기를 조성한 뒤 초안을 제시하였다. 서구 열강이 시작한 근대외교의 경험이 없는 조선 관리는 조약문이 갖는 허점을 알지 못했다. 머리회전이 빠른 이노우에 가오루는 어리버리한 조선의 약점을 파고 들었다.

치외법권 설치와 무관세, 조선 연안측량권 등 강화도 조약의 핵심의 상당수가 사실상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에 올 때 주일미국공사로부터 ‘페리의 일본원정소사’라는 책을 받았다. 미국이 일본에게 했던 무력 개항 수법이 담겨있다. 강화도 조약을 성공시킨 그는 1879년 외무경에 오르고 곧 외무대신이 된다.

외무대신으로 1883년 고급사교장인 로쿠메이칸(鹿鳴館)을 세워 외국인들의 환심을 산다. 일본인 가운데 이 곳 출입은 화족과 정부 고관 등 특권층 뿐이었다. 도쿄에 관청을 집중시켜 프랑스 파리나 독일 베를린에 버금가는 도시로 키우려 했다.

그는 김옥균과 박영효을 부추겨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했다. 김옥균에게 300만엔의 차관을 약속하나 지키지 않았다. 김옥균의 암살을 미리 알았으나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1894년 주한공사로 조선에 온다. 고종에게 개혁을 압박하고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려 했다. 왕의 정치 참여를 막으려 했다. 그는 “늙은이의 녹슨 실력을 실험해 보고 싶었다”며 장관에서 급이 한참 낮은 공사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명성황후 시해를 위해 사전 작업을 하고 하기시 출신 후배인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추천해 파견한다.

이노우에는 전형적인 2인자 체질이었다. 강화도 조약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보다 4살이나 많았다. 절친 이토보다는 이노우에가 5살이나 많다. 육군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보다는 2살이 많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 이들의 조력자로 지낸 조연 체질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인연 각별

1836년 하기에서 출생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1850년대 후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평생 동지가 된다. 나이는 이노우에가 여섯 살 위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영국 대사관에 불을 지르기도 했으며 1863년 조슈파이브가 돼 유럽 견학에 나선다. 이토히로부미와 함께 영국을 유학한다. 고생하면서 평생 친구가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대표로 무장출신의 강경파인 구로다 기요타가가 결정되자 이를 누그러뜨릴 인물이 필요하다며 부대사로 이노우에를 추천해 관철시킨다. 1908년 이노우에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이토는 10여일간 병상을 지켰다. 훗날 평론가들은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이 깊고 협기가 있으며 이토가 부탁하면 아무리 나쁜 역할이라도 감수하며 책임을 완수했다고 평했다. 이노우네는 이토보다 연장자고 서열이 위였으나 내색하지 않고 모든 일을 형님처럼 도왔다고 했다. 한 일본인은 이토가 부탁하면 아무리 나쁜 역할이라도 감수하며 책임을 완수했다고 평했다.

1901년 이토가 총리를 사퇴하자 잠시 총리를 맡아 조각에 착수한다. 그러나 입각자들이 거절해 결국 정식 총리는 되지 못했다. 러일전쟁 때는 대장상을 맡았다. 1915년 사망했다.

◆미우라 고로

미우라 고로는 이노우에 가오루 후임으로 조선 공사로 부임한 후 명성황후 시해를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육군 중장 출신이다. 공사부임 기간은 1895년 8월 17일부터 1895년 10월 17일이다. 불과 두달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군, 경찰과 낭인들을 지휘하여 경복궁을 기습하여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의 총책임자다.

1895년 주한공사로서 조선에 부임한 그는 10월 8일 새벽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군과 경찰 및 낭인(浪人)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웠다.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시해된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폐서인조칙(廢庶人詔勅)을 내리도록 하였다.

조선이 청일전쟁후 러시아 쪽으로 기울자 초조해진 일본은 조선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감지하고,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를 소환하였다. 대신 그의 추천을 받아 외교에는 무지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를 파견하여 음모를 꾸몄다.

새로 부임한 미우라는 참선승을 자처하며, 남산의 일본공사관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였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杉村濬)를 통하여 은밀히 황후제거계획을 짰다.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를 중심으로 스기무라, 조선궁내부 및 군부고문관 오카모토(岡本柳之助), 포병중좌 구스노세(楠瀨幸彦) 등이 실행 방안을 확정하였다.

사건후 잠시히로시마감옥에 수감된 미우라 등 범죄인들은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됐다.

하기에서 출생한 그는 막부(幕府)타도운동에 참여하고, 메이지 유신 후 신정부의 군인이 되었다. 1878년 육군중장, 1888년 예편 후 1890년에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이두 기자  ld@1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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