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존불에선 온화한 미소가 읽혀지나 마모로 그 표정이 뚜렷하지 않다

보원사지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2006년부터 12년 계획으로 발굴을 시작하여,현재 탑 뒤 쪽 금당지를 중심으로 발굴되었다. 

특히 금당지는 예상대로 상당히 큰 규모였으며 중심부에는 부처님을 모셨을 거대한 대좌가 놓여 있다. 현재 드러난 각 건물지 아래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건물지를 발견하였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위치하고 있는 보원사(普願寺).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으니 보원사지(普願寺址)

 라고 해야겠다. 이 절은 백제 말기에 창건하여 고려조에 이르러 99채의 절집을 갖춘 대찰이었다고 한다.서산 마애삼존불의 본사라고도 하고, 한때는 고란사라는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사찰의 승려가 많아서 쌀을 씻은 뜨물이 내를 흐르게 했고, 절에서 십여리 떨어진 마을에서 냇물을 떠다 끓여 숭늉으로 마셔 그쪽 벌판 이름이 숭늉벌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이 세상에 알려지기전에 이곳 사람들은 이 삼존불이 있는 곳을 인바위(印岩)라 불렀다는데 아마 바위에 부처님을 새겼기에 얻은 이름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겠다. 

 옛날엔 이곳도 심신산골이었나 보다. 1959년 이 골짜기를 답사하던 부여박물관장 홍사준 선생은 이곳에 혹 부처님 새긴것이나 석탑 무너진 것을 본 일이이 있느냐며 탐색을 했는데 한 나이 지긋한 나뭇군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 옆에 본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시유. 근데 작은 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 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던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 이 상을 자세히 살피면 그런 얘기 할만도 하다 하는 느낌이 든다.

 부처님 상호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없던 그 농부의 말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빙그레 웃으며 깊은 연구를 한 학자보다 더 해학적인 탁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태을암은 고려 말 창건한 사찰로 단군영정을 모셨던 '태일전'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지만 유래를 증거할 만한 흔적들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사찰이 주목받는 이유는 마애삼존불 때문이다. 흔히 마애삼존불은 서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태안에도 마애삼존불이 있는데 바로 태을암 옆에 있다. 

커다란 바위 면에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훼손을 막기 위해 그 위로 보호각이 모자처럼 씌워져 있는데 세월의 무게 탓인지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다.

이곳의 마애삼존불은 국보 제307호로 지정된 것으로 가운데 관음보살이 있고, 좌측에 석가여래와 우측에 약사여래가 서 있다. 석가가 약사보다 조금 더 크고, 관음보살은 그 사이에서 작게 표현되어 있다. 석가여래가 아닌 관음보살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형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 삼존불은 서산의 것과 마찬가지로 7세기 무렵에 조성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서산의 삼존불에서 웃음기 머금은 표정을 읽을 수 있다면 이곳의 삼존불에선 온화한 미소가 읽혀지기는 하나 마모로 인해 그 표정이 뚜렷하지는 않다.

마애삼존불 옆에는 한 줄기 계곡물이 흐르는데 이곳의 큰 바위 벽면에는 '태을동천'(太乙同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앞에는 '일소계'(一笑溪)라고 씌어진 바위가 있다. 

19세기 후반 김규황이라는 이와 그 후손들이 쓴 글씨다. 그 앞쪽에는 감막대(感幕臺)라는 석재 탁자와 의자가 있다. 관찰사를 배알하던 곳이라고도 하고,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라고도 하는데 이 모든 풍경들이 도무지 사찰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한편 이곳에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 충렬왕 13년(1286년)에 쌓은 석성이다. 둘레는 619m, 높이 3.3m라고 전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정상의 봉수대와 서쪽 성곽의 일부분이 풍파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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