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좌리는 정월 보름에 당제를 지내는데 제를 지내는 곳은 장도라는 섬과 마을 안 사장나무 거리이다.

장도의 당은 섬 가운데 위치한 당집인데, 당집을 둘러싸고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당집은 마을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동향으로 세워졌다. 그 안에는 주신 송징(宋徵) 장군과 우측에 정년(鄭年) 장군, 좌측에 혜일(惠日) 대사가 모셔져 왔으나 1982년부터 장보고 장군을 모시고 있다.당제를 위해서 정월 초사흘에 마을 회의를 열어 제관, 제비, 굿칠 사람을 선정하고 제사를 정월보름에 지낸다.우리나라 남해안에 위치한 완도에는 신라시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가 해마다 진행되고 있다.

장보고(張保皐)는 (생년 미상- 846년 卒) 신라 무장으로 본명은 궁복 (弓福), 궁파 (弓巴)이며, 위 이름은 '활을 잘 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그는 젊어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무과에 급제하고, 당나라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무령군소장 벼슬을 지냈다.

그런데,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의 비참한 모습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흥덕왕 3년 (828년) 신라에 귀국한 후,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하기 위해 왕의 허락을 받아 1만의 군사로 청해(淸海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적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전한다.

장보고의 일대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화려했다. 단순히 청해진에서 해적을 소탕한 것 만 아니고, 한반도-일본열도-중국대륙-아랍을 연결하는 대해상 무역로을 개척하여 동아시아의 대교역 바닷 길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의 행적은 비단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중동의 아랍권에도 보이며, 속일본기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속일본기에 보이는 그의 이름은 張寶高 인데, 이름이 보배 보, 높을 고 이다.寶高의 뜻을 풀이하면 '보배 중의 최고' 이다.

한편 오늘 날에도 일본 궁내청 (왕실) 창고에는 장보고가 일본에 교역한 물품이 지금도 보관되고 있으며, 속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일본 천황이 장보고의 교역물품을 적극 수용하되, 다만 가산을 탕진하지 않도록 하라는 기록도 보인다.

즉, 장보고 교역품은 당대 최고의 물건으로 일본 내에서 귀족들 사이에 호가에 매매 되어, 일부는 그 물품을 구입하느라 가산까지 탕진하는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한편, 일본에는 장보고와 거래를 하여 막대한 부를 누린 관료가 있었는데, 그가 훈야노미 야타마로(文室宮田麻呂) 이다.

그는 신라에서 장보고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보고 부하들이 가져온 교역품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장보고에게 거액의 선금을 투자했는데, 장보고가 죽었으니, 물품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물품을 압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일본 천황이 이는 물품을 탈취한 것으로 보고 다시 장보고 측근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속일본기에 보인다.
 
아무튼, 장보고는 그 당시 우리 신라 뿐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 중국, 아랍권까지 그 이름을 떨친 위대한 장군이요, 역사상 유례없는 최대 교역상인임을 알수 있다.그런 장보고가 우리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그 비중이 상당히 적다. 그러다보니 오늘 날 중국에서는 장보고가 본래 신라 사람이 아니고, 중국 사람 이라고까지 우길 정도이다.

이 위대한 인물 장보고가 우리 역사에서 야박했던 이유는 838년(희강왕 3년)에 장보고는 왕권 경쟁에서 밀린 김우징을 완도로 불러온 후, 왕권다툼에서 희강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 (우징)을 옹립했다. 그리고 신무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 신라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한편 신무왕 사후 태자 문성왕이 즉위했는데, 이번에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에게 시집 보내고자 했다. 그런데 그 권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귀족들이 그 혼인을 반대했고, 결국 염장으로 하여 장보고를 암살토록 하였다.

즉, 장보고의 말년 인생은 비참했고, 한편 왕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인물이라는 오명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한 유학자 김부식의 눈에는 그 장보고가 썩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날에도 전남 완도에서는 해마다 장보고 제향을 올린다.

그렇다면, 장보고가 849년에 卒 하였으니, 그 제향 행사가 1150년 동안 지속 되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사실 장보고 제향은 불과 30년쯤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전 완도에서는 송징을 주신으로 하고, 정년과 혜일대사를 모시는 제향이 있어다고 한다.

여기에서 정년은 장보고의 친구이다. 정년은 젊은시절 장보고와 함께 당에 건너가 무과에 급제하고, 무장으로 활약 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벼슬길이 막혀 한 동안 당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고, 먼저 신라로 귀국한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출세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또한 신라로 건너와 장보고에 의탁 하던 중, 훗날 장보고를 도와 민애왕을 쫓아내고 신무왕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렇듯 장보고의 친구 정년은 완도의 신으로 그 동안 모셔왔는데, 장보고는 역적의 오명 때문인지 비교적 근래에 그 이름이 빛나기 시작하는데, 현재 완도의 제향은 본래 장보고가 아니었고 송징 대장군을 주신으로, 정년과 혜일대사를 모시는 제향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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