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정의 鵞池서 노니는 거위를 보니 왕희지가 절로 떠올라

글 章石 徐明澤

75세 되던 해 육유는 심원(沈園)을 다시 찾아 40여년의 세월에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는 심원을 바라보며 아름다웠던 당완과의 사랑을 떠올리며 회한의 눈물을 담아 두 편의 시를 남긴다.

城上斜陽畵角哀 성곽에 노을 지니 화각소리 애절한데

沈園非復舊池臺 심원은 옛 모습(池臺)을 찾을 수가 없구나!

傷心橋下春波綠 마음 아파했던 그 다리 아래 봄 물결은 푸른데

曾是驚鴻照影來 아름답던 그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스치네.

夢斷香消四十年 꿈은 끊어지고 향기 사라진지 40년

沈園柳老不吹綿 심원의 버들은 늙어 솜도 날리지 않네.

比身行作稽山土 이 몸도 곧 죽어 會稽山 흙이 되겠지만

猶弔遺蹤一泫然 그녀의 옛 자취 그리면서 한없이 눈물 흘리노라

노란 蘭梅가 활짝 피었다가 기습 한파에 시들어버린 심원에서 이 두 시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우리 중에 시객이 있어 이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었으리! 먼저 마하선생이 沈園釵頭鳳所懷를 시제로 절구 두수를 읊으니

門前裂隙巖雲斷 문 앞의 갈라진 바위 구름이 갈라진 듯

幽徑彎彎似曲腸 오솔길 구불구불 哀肝腸과 같구나.

迷醉無邪詞兩首 思無邪 詞 兩首에 넋 잃고 취하여

不知何處昨今忘 여기가 어딘지 옛 인지 지금인지 잊은지도 몰랐다네.

情人游琬釵頭鳳 사랑했던 육유 ․ 당완의 차두봉 詞

莫比悲凉離索情 애달픈 이별의 정 견줄 것이 없어라

春亦冬心還惜別 봄조차 마음은 겨울인양 이별이 아쉬워

蘭梅開且凍爲營 蘭梅를 피웠다가 다시 얼게 했을터

그리고 나는 沈園有感을 한 수 읊으니 어찌 여기 모인 이들로 하여금 슬퍼하지 아니 하였겠는가!

陸唐密愛沈園緣 육유와 당완의 깊은 사랑 심원의 인연인데

四十離痕雲斷邊 사십년의 이별의 흔적 雲斷石에 남았구나.

兩詞釵頭靑史赫 차두봉 兩詞는 역사에 빛나니

騷人此事題書傳 시인들 이 일을 글로 써서 전하네.

다음날 아침 紹興에 도착, 蘭亭에 들어서니 竹軒과 蘭亭古蹟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난정서가 刻石되어 있었다. 또한 난정의 驚句들이 곳곳에 게시되어 현지임을 실감나게 하였다.

난정 입구에 도착하여 鵞池에서 노니는 거위를 보니 왕희지가 절로 떠올랐다. 왕희지는 거위를 사랑하여 키우기도 하고 ‘鵞’자를 자주 쓰기도 하였다 한다. 어느 날 왕희지가 거위 ‘鵞’자를 쓴 후 ‘池’자를 쓰려고 할 때 城主가 도착하여 잠시 자리를 비운다. 그 사이 여덟살 난 아들 獻之가 ‘池’자를 써 넣어 ‘鵞池’가 완성되었는데, 두 부자가 합작으로 쓴 글이라 하여 ‘父子碑’라고도 불리며, ‘池’자의 풍격이 深厚하고 아버지 글씨와 차이가 거의 없다고 평해진다.

왕희지 두 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是雨 文友가 ‘鵞池’에 대한 시를 읊었다.

右軍閣筆籠鵝去 왕우군이 붓 놓으며 거위 안고 떠나니

妙墨扇中那覺婆 묘한 글씨 부채에 있는 줄 노파가 어찌 알았으리.

帶霧幽墟苔篆疎 안개 낀 유허에는 이끼 덮인 비액만 우뚝한데

折碑何事冒譏呵 무슨 일로 비를 꺾어 꾸지람을 무릅쓸까?

▲ 유상곡수(流觴曲水)에서 환담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아지를 지나 유상곡수에 이르니, 고문진보에서 상세히 읽은 蘭亭記가 그려졌다. ‘流觴曲水筵은 서기 353년 3월 3일 절강성 산음현 회계산 북쪽에 蘭亭이란 정자에서 당시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 등 명사 42명이 모여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행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했다. 42인중 “王羲之 ․ 謝安 ․ 謝万 ․ 孫綽 ․ 徐豊之 ․ 孫統 ․ 王彬之 ․ 王凝之 ․ 王肅之 ․ 袁嶠之 ․ 王徽之”등 11인은 시를 각 2수를 지었고 “郄曇 ․ 王豊之 ․ 華茂 ․ 庾友 ․ 虞說 ․ 魏滂 ․ 謝繹 ․ 庾蘊 ․ 孫嗣 ․曹茂之 ․ 曹華平 ․ 桓偉 ․ 王玄之 ․ 王蘊之 ․ 王渙之”등 15인은 각1수를 지었고 “謝瑰 ․ 卞迪 ․ 丘髦 ․ 王獻之 ․ 羊模 ․ 孫熾 ․ 劉密 ․ 虞谷 ․ 勞夷 ․ 后綿 ․ 華耆 ․ 謝藤 ․ 任儗 ․ 呂系 ․ 呂本 ․ 曹禮”등 16인은 시를 짓지 못하여 각 벌주로 三觥을 마셨다고 전한다. 읊은 시를 모아 序文을 왕희지가 鼠鬚筆로 썼는데, 왕희지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지으려 해도 지을 수 없었다는 초고본으로 신의 작품이라 일컫기도 하는 蘭亭會記의 蘭亭集序이다. 禊事를 행하는 날이 원래 상사일이었으나 중국 ‘荊楚歲時記’에 의하면 曹 ․ 晋나라 때 와서는 음력 3월 3일 삼월 삼짓날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 때가 되면 백성들이 액막이(修稧)라 하여 물가로 모여드는 데, 이 때 流觴曲水하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일이 행해졌다. 그 후 1985년부터 매년 삼월 삼짓날을 기해 서법절로 정하고 동 행사를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