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을미년으로 명성태황후(고종태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의 나라를 선포한후 명성태황후로 묘호를 내렸다)가 시해된 지 120년째가 되는 해이다. 을미사변이라는 치욕적인 사건을 겪은 조선은 이후 일본에 합병됐고, 일제에 의해 35년간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됐다. 그 후 1945년 독립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의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다시 돌아온 을미년, 지금으로부터 120년전 시해된 명성태황후의 생애를 되짚어본다.

◇ 명성태황후 어린시절

명성태황후(민자영)는 1851년(철종 2년) 음 9월 25일 여주시 근동면 섬락리(현 여주시 능현동 250-2)에서 아버지 민치록(1799-1858) 여양부원군 두번째 부인 한산이씨 한창부부인 사이에서 출생했다. 총명하고 영리하다는 주위의 찬사를 받으며 8세까지 여주에서 성장하고 서울 안국동(현 덕성여고 자리) 민유중의 생가 감고당(여주 생가로 이전 복원됨)으로 이주하여 고종태황제와 가례시까지 감고당에서 살았다.
감고당(感古堂)은 320여 년전 숙종대왕이 仁顯王后 생가(부원군 민유중)로 건립해준 생가에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밀려나 5년간 기거한 생가를 인현왕후로부터 사랑받고 성장한 영조대왕이 방문하고 감고당으로 시호를 내린 감고당이 이곳 생가로 이전 복원되어 있다.
황후의 생부 민치록은 인현왕후(숙종의 계비)의 부원군 민유중의 5대 종손으로 여주시 능현동에 안치된 묘소를 돌보는 묘막에서 명성태황후를 낳았다.
묘막(생가)은 1687년(숙종 13년)에 건립했는데 그동안 쇠락하여 89㎡(27평)만 남아있던 것을 여주시가 1995년 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생가를 190㎡(58평)규모로 복원했다. 
생가앞 황후의 공부방이 있던 앞면에 아들 순종효황제가 명성태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 이라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婢)를 눈물을 머금고 경건하게 쓴다고 비각에 새겨져 있어 애련한 비문이 비각속에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 명성태황후의 가례

흥선대원군(이하응)의 둘째 아들(明福)을, 순조의 아들 익종의 비 조씨(신정왕후)대왕대비가 아들로 언명하여 조정의 논란을 진정시킨 뒤 제26대 임금으로 즉위한 고종대왕 이시다.
따라서 조대비 자신은 나이가 많고 임금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국정전반의 실권을 대원군에게 위탁하여 섭정하게 했다. 실권을 잡은 대원군은 국정이 부패하고 탐관오리의 농간으로 민심이 이간됐다며 개혁을 단행했다. 실권을 잡은 대원군은 왕비책립 문제가 거론되자 좌의정 김병학의 딸과 영의정 조두순의 손녀도 파기하고 외척발호의 우려가 없고 정치에 관여치 않는 인물을 고르다 부인 민씨(부대부인)의 동생이 양자 간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민치록의 딸과 1866년(고종 3년) 3월 22일 인정전에서 문무백관의 하례속에 상견례를 거행했다.

◇ 명성대황후와 대원군의 갈등

1868년(고종 5년)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태어났다. 첫아들을 본 고종과 대원군에게는 경사였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여 장희빈에게 밀려났던 인현왕후의 실정을 잘 아는 황후는 심각했다. 위기를 느낀 황후는 고종의 총애를 얻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고 근친들인 민승호, 민규호를 요직에 배치하고 조대비의 조카 조영하와 접근 민씨 일가와 결탁하게 했다. 이어서 대원군의 장남 재면을 이용하여 대원군의 기밀을 캐내고 대원군과의 불만세력인 형 홍인군과 이최응을 끌어 들이고 유림의 거물 최익현도 끌어 안았다. 이로서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마침내 원자를 출산했다. 그러나 선천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원자는 4일만에 사망했다. 원인을 대원군이 보낸 산삼탕과 연관지으며 증오가 됐다. 따라서 대원군에게 위임해 둔다면 임진왜란 같은 국난이 올지 모른다고 진언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임명 대원군 휘하 대신들의 무능을 상소케 하자 고종은 충성된 마음으로 나를 깨우치게 했다며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이에 대원군은 측근들을 동원 최익현을 탄핵케 했으나 고종은 도리어 탄핵한 대간과 여러 조신들을 모조리 파직시켰다. 따라서 황후도 기민하게 움직이고 최익현은 대원군을 직접 견양하여 국정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상서가 올려졌다. 이에 고종은 1873년(고종 10년) 11월 5일 마침내 친정을 선포했다.

     
◇ 개항(開港)

대원군이 물러난 조정은 새롭게 개편됐다. 영의정에 이유원 좌의정에 홍인근 우의정에 박규수가 임명되고 조영하, 김병국 등이 종용됐다. 그리고 황후의 의중은 민승호와 민규호가 대행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반발이 대단한 가운데 잇따른 화재사고가 발생하고 황후생모 부부인 이씨와 민승호와 아들이 누군가가 보내온 봉물함을 열다 이씨와 아들 손자 등 3식구가 폭사했다. 이런 일련의 배후 조종자로 대원군이 지목됐다. 따라서 대원군 세력을 몰아내려는 집념은 대단했다. 따라서 중앙정계는 물론 지방의 수령 방백들까지 파직 또는 유배시켰다. 황후는 첫아들을 잃은 후 1873년 1월에 딸을 추산했으나 다시 잃고 1874년(고종 11년) 2월 8일 다시 왕자를 출산했는데 이분이 제27대 마지막 임금 순종효황제시다.
일본은 대일외교의 묘안을 찾지 못하자 빠른 외교를 보기위해 영국에서 구입한 운요호 등 3척의 군함을 동원 계획된 도발을 강행했다. 2백 45톤급 근대적 장비를 갖추고 침입하여 조선은 전사자 35명의 피해를 입는 등 막중한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은 교묘히 그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고 정치 외교의 중대한 문제로 비화시켰다. 일본은 조선 진출에 방해를 막기위해 청나라 종속관계를 이유로 운양호사건을 청나라에 묻자 구미열강에 시달리던 청나라는 조선과 일본 조약을 권유했다. 이로서 1876년 2월 3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병자수호조약을 채결했다. 조약은 12개 조문으로 조선을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하다고 하여 청나라와 분리시켰는데 이것은 조선 침략에 유리한 계산의 술책이었다.

◇ 임오군란과 조선의 근대화

개항이후 일본은 소비성 상품을 팔고 쌀1섬에 40전에 사서 일본에서 6∼8원에 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이에 조선은 쌀부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국가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지방관리들의 착복과 횡령 등으로 구식군인들의 급료도 지급하지 못했다. 1882년(고종 19년) 6월 5일 급료를 준다는 통보를 받고 달려간 군인들에게 썩은 쌀을 나누어주고 그마저도 모자라게 주자 나누어주던 고지기를 구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이 체포되자 구명에 나선 군인들이 이경하의 석방청원 편지를 들고간 민경호의 하인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자 분노한 이들은 하인들을 때려죽이고 집기와 구구를 부수고 대원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자 이들에게 무장을 식혀주었다. 이에 조정은 수습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민씨들의 저택을 부수고 일본공사관을 불태우면서 수자는 늘어나 창덕궁으로 쳐들어가 황후를 찾았다. 이때 황후는 평범한 궁녀복으로 변복 후 부대부인 민씨(흥선대원군부인)의 사인교를 타고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으로 창덕궁을 빠져나왔다. 이후 황후는 여주를 거쳐 충북 감곡면 민응식 집에서 피신했다.
한편 고종은 대원군에게 수습 전권을 위임했다. 위임받은 대원군은 왕비께서 난군들에 의해 승하하셨다며 국장준비를 하고 군인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임오군란 중에 입은 피해보상을 요구하자 이에 청나라는 중재를 자임하고 4천명의 병력을 동원시켰다. 일본과 청나라의 무력 앞에 속수무책인 대원군은 청나라로 유배됐다. 대원군이 실각되자 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왔지만 조선은 외세에 의해 허물어져 갔다. 개화의 물결은 왕실내부에서도 일었다. 미국여성선교사의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한다하여 이화학당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이때에 동학혁명이 시작되자 황후는 “동학의 무리를 왜놈들처럼 여기랴만 임오군란과 같은 군란은 참을 수 없다”면서 “청병진입을 주저하지 말라”했다.  

◇ 을미사변

동학혁명진압을 위해 청병을 요청하자 천진조약 규정에 따라 일본군을 끌어들인 꼴이 됐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포위하고 4대문을 접수하고 고종과 황후를 위협 대원군을 불러들이게 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다며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왕실을 압박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이 간섭하자 요동반도 점령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자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한 황후는 임금이 대신들과 접촉 대소정사를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그동안 노력한 결과가 수포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일본은 육군준장 출신 미우라를 부임시켰다. 신임 봉정을 위해 고종을 배알할 때 정치는 관심 없고 풍월이나 즐기며 명성황후께 관음경의일부를 들려드릴까 한다며 고종과 황후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거사에 참가할 일본군 30명 경찰 10명 조선훈련군과 일본군수대비로 구성했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5시 30분 일본 흉도들에 의해 시해되시니 외세에 당당히 맞서며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키려던 비운의 왕비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때 나이 44세였다.

◇ 여주시 명성태황후 생가 성역화로 왜곡된 역사 바로 잡아

여주시는 13년에 걸쳐 250억원을 들여 생가주변의 민가와 전답 등을 매입 66만㎡의 부지를 확보 축조된 옛집을 원형대로 보전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와 공부방 등을 복원하여 생가의 위엄을 갖추고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기념관을 건립했다.
이곳 기념관엔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한 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와 시해장면을 재연하는 매직비전을 상영하여 황후의 애련한 모습을 상기하고 황후의 부드럽고 정겨운 면과 냉철한 성품이 잘 드러난 20종의 친필 어찰등을 보전 했다.
이외도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고종황제의 친필 금래서실(琴來書室)을 비롯하여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의 친필 등을 갖추어 많은 관람이 찾고 있다.
.그리고 전시관을 나오면 전면 우측에 황후의 동상과 볼거리로 조성된 연못이 상쾌하게 보인다. 이외 숙종대왕이 320연전 계비 인현왕후 생가(부원군 민유증)로 건립해준 감고당(感古堂 영조의 휘호)을 이전 복원한 한옥은 생가를 돋보이면서 관람인들 저마다 감탄을 한다.
이같이 황후의 생가는 성역화가 잘 조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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