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봉 서울취재본부 국장대우
이민봉 서울취재본부 국장대우

“저는 너무나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 게임 속의 ‘말(馬)’일 뿐입니다.”

퇴직금 50억원 논란의 당사자인 곽상도의 아들 곽병채가 입장문을 내놨다. 이로 인해 극심한 박탈감을 느낄 청년들의 마음을 1도 생각하지 않은 용감무쌍한 ‘말(言)’이다. ‘말’이 ‘말’을 한 셈인데, 50억원이 열심히 일한 대가라는 취지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대장동 사건의 본질이 수천억 벌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설계의 문제입니까. 그 속에서 열심히 일한 개인의 문제입니까” 누가 정치인의 아들 아니랄까 봐 기상천외한 프레임까지 들고 나온다. 어떤 개인이 열심히 일했다고 50억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오징어 게임' 속 대사를 인용해 곽상도 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당신,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거짓이야?”

상금 456억원이 걸린 살인게임을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세계를 평정했다. 미국을 비롯한 무려 70여 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줄다리기’ ‘구슬치기’ 등 전통놀이가 잔인한 살인게임으로 둔갑할 때 느꼈던 공포심보다 곽병채가 꺼내놓은 이 말들을 더 소름끼치게 느꼈다. 반전 미스터리의 끝판왕인 ‘대장동 스토리’는 곽병채 에피소드가 더해지면서 한국 대선판에서 '오징어 게임'을 능가하는 흥행을 기록할 태세다. 

곽병채는 아마 대장동 설계자로 이재명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니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방면에서 이재명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대장동 사건이 터지자마자 이재명은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성남시장 시절의 치적임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사건을 아예 ‘국민의힘 게이트’로 규정했다. 수사도 자청했다. 주위의 일부 우려에도 강공 드라이브로 일관했다. 민주당 대선후보를 사실상 결정해온 호남 경선을 코앞에 두고 이재명은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돌진했다. 이 아슬아슬한 승부처에서 이재명은 사실상 ‘판정승’을 거뒀다. 광주-전남 경선에선 미세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전북 경선에서 압승함으로써 ‘호남이 선택하지 않은 첫 번째 대선후보’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 

이번 호남 경선은 무엇보다 역전을 노렸던 이낙연에게 아쉬운 결과다. 광주-전남에서 승리했다고는 하나 누적 득표율의 변화는 거의 없었고, 이재명의 과반 행진을 허용했다. 대장동 사건은 분명 1위 후보인 이재명에겐 악재였고 변수였지만 이번에도 이낙연은 이것을 낚아채는 데 실패했다. 이낙연은 승부처에서 ‘엄중하게’ 머뭇거렸고,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했다. 

이번 민주당 경선은 애초부터 ‘대전환’의 이재명이냐, ‘대통합’의 이낙연이냐의 대결이었다. 이재명은 기본소득 논쟁 등으로 대전환의 이미지를 이어갔지만, 이낙연은 섣부른 네거티브 전략으로 대통합 이미지를 훼손했다. 하지만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는 3일, 경선인단 50만명이 걸린 2차 수퍼 위크가 남아 있다. 현재 추세로 볼 때 이재명의 본선 진출이 거의 9부능선을 넘은 것으로 보이지만 완전히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나아가 이재명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꼭 전쟁(본선)에서 이기리라는 보장도 없다. 과거는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하고, 미래를 위해 토건기득권 카르텔의 해체와 부당수익금 환수라는 강력한 정책 비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이재명은 강인하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기려면 현재에 대한 공감 능력을 더해야 한다. 대장동 사건 역시 극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국민의 마음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공감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다. 잠시 멈춰 서서 대중의 입장과 처지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감은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적 감정의 핵심이다. 

조용한 공감의 리더 메르켈이 곧 퇴임한다. 김호기 교수는 한 칼럼에서 “개혁과 통합을 동시에 모색한, 말보다 행동을 우선한 메르켈의 리더십이 우리 정치에 안기는 함의가 결코 작지 않다”고 썼다. 퇴임 직전 조사에서 지지율 80%를 기록한 메르켈의 이 한마디를 새겨들으면 좋겠다.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엇이든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대선에서도 이런 품격 있는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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