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리 바닷가에서
                                 

                                                           양성우

나 차마 못 떠나겠네
비단같이 곱고 잔잔한 흰 바다, 뽀얗게 떠도는 물안개를 두고
나 차마 이 바닷가를 못 떠나겠네
서로들 마주보며 떠 있는 다소곳한 작은 섬들, 그 너머 저 멀리
둘러선 쪽빛의 산봉우리들을 어찌할꼬
보드라운 모래톱, 검푸른 솔밭, 긴 물결 부서지는 소리를 두고
나 못 떠나겠네
아무도 내 몸을 붙들지 않아도, 나 차마 못 떠나겠네
별처럼 찬연하게 깨꽃이 피고 고구마넝쿨 무성한 비탈밭
반짝이는 동백잎 배롱꽃 분홍꽃잎들을 두고 나 돌아가지 않으리
차라리 희부연 초승달 밑, 방파제 끝머리에 혼자 앉아서
내 오래된 슬픔을 내 손으로 누를까
나는 밀물에 떠밀려오는 바다풀인지도 몰라 지푸라기 나뭇가지
부스러기인지도 몰라
여태껏 한 치 앞을 모르고 살아왔으므로
내가 어딘가로 총총히 돌아가는 길, 거기에 또다시 덫이 있고
수렁이 있다면 그 무슨 인생인가
나 여기 떠나지 않으리
고즈넉한 산자락, 붉은 흙을 두껍게 다진 앞마당을 지나
호젓한 억새풀밭 엉겅퀴 꽃대궁 아래 두 손을 모으고 종일토록
저 흰 바다를 바라보겠네

※ 송호리는 최남단 해남 땅끝 마을로 仁松文學村吐文齎(인송문학촌토문재)가 있다.

                                                         화가 김대원.
                                                         화가 김대원.

 

 

 

 

 

 

 

 

 

 

 

 

양성우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고 전남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70년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겨울공화국'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북치는 앉은뱅이' '낙화' '첫마음' '길에서 시를 줍다' '아침꽃잎'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압록강 생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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