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편집위원

깊은 밤, 야간 근무 중인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늦은 시간에?”

“우리 협상 봐요.”

대목이라서 뭔가 보긴 봐야겠는데, 선수를 놓쳤다. 다른 좋은 것도 많건만 하필, 말을 꺼내 봤댔자 본전도 못 챙길 게 뻔할 뻔 자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만난 지도 꽤 오래됐다. 그렇지 않아도 추석 즈음에는 그럴싸한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거절할 구실 거리를 둘러대며 처음의 약속을 어긴 게 마음에 걸리긴 했다.

“몇 시에?”

“4시경이 적당해요. 협상 보고 저녁 먹어요.”

요즘 최대의 화두는 ‘협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온 지 사흘만인 지난달 23~27일까지 3박 5일 일정으로 지구의 반대편 미국 뉴욕까지 다녀왔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협상 후 한-미 FTA에 사인했고, 제73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믿어주십사 간곡하게 호소했다. 우리끼리 협상하겠다는데 남의 제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갑질할 명분이 서질 않는 미국은 겉으로는 느긋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급하고 답답할 거다. 미국에서 만난 일본 총리 아베에게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정 선을 긋겠노라 못 박았다. 그런 것에 대해 무조건 반대와 찬양으로 왈가왈부 난리다. 정치는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특활비를 두고 어쩌고저쩌고 말들이 많다. 협상이 안 된다. 내로남불, 자기는 괜찮고 남은 절대로 못 봐주겠다는 심보다.

5일간의 추석 연휴라서 놀 만큼 실컷 놀고 푹 잘 쉬었다. 올해도 이젠 석 달밖에 안 남았다. 우리 동네 체인점 돼지족발집 삼식 씨는 형제들끼리 모인 추석날 밥상머리에서 돈 문제로 아예 갈라서게 됐단다. 이래저래 허리띠 졸라매고 돈을 긁어모아야 사람 구실이라도 제대로 하는 세상이다. 다달이 본사로 보내는 로열티도 만만찮아 인건비라도 아끼려고 충성심 강했던 직원까지 잘라냈다. 바쁠 때는 시집간 딸내미까지 불러들여 온 식구가 매달리지만 이미 엄청나게 불어난 적자를 메운다는 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란다. 세상이 이처럼 살아남기 위해 아수라장인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세월은 치타보다도 더 빠르게 내달린다. ‘본인 외 개봉 엄금’이라며 붉은 빗금 쳐진 독촉장이 우편함에서 물끄러미 쳐다본다.

10월에는 지역마다 이런저런 축제가 거의 매일 열린다. 10월의 달력을 보니 절반가량이 다양한 기념일로 깨알처럼 박혀있다. 어제 1일은 국군의 날이고 오늘 2일은 노인의 날이다. 내일 3일은 개천절, 하루건너 5일은 세계 한인의 날, 이틀 후 8일은 재향 군인의 날이다. 9일은 한글날 다음은 임산부의 날이다. 가운데 주 월요일은 체육의 날, 주말은 문화의 날이며, 셋째 주 일요일인 21일은 경찰의 날, 24일은 국제연합일, 25일은 독도의 날, 27일은 대한적십자 창립일이다. 마지막 주 일요일 28일은 교정의 날, 29일은 지방자치의 날, 10월의 마지막 전날인 30일은 금융의 날이다. 정말 볼수록 화려한 무늬다. 3일과 9일은 법정 휴일이고, 2일은 대체 휴무일이니 4, 5, 8일 연가(年暇)를 내면 연속으로 한 열흘간 푹 쉴 수 있겠다. 하지만 9월 마지막 주도 딱 이틀 일하고 일주일씩이나 쉬었는데, 인두겁을 쓴 철면피가 아닌 담에야 그림의 떡이다.

“알았어요. 그 시간에 맞춰갈게요.”

별 재미가 없다면 지난번처럼 살짝 잠을 자도 눈치채지 못한다. 앞줄 가운데쯤이라서 주변에 많은 사람이 빙 둘러 에워싼 기분이다. 불이 꺼지자 입을 다물고 정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란스럽게 예고편이 지나가고, 본격적인 협상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질범 현빈(민태구 역)이 서울경찰청 손예진(하채윤 역)을 협상 상대로 지목한다. 생명을 담보로 벌이는 일생일대의 협상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했는데, 어젯밤의 피곤이 안 풀려 졸음이 물밀 듯 밀려왔다. 그때, 저격수가 쏜 총알이 뒤통수에 “뽜??” 박혔다. 만든 사람들 자막이 서서히 올라가면서 협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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