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들이 쳐들어와 섬진강까지 밀리자 뚜꺼비 수백마리가 다리를 놓아

평화롭고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훈자마을, 봄빛이 빼어난 광양과 하동을 꼽는 이유는 매화꽃과 하동 화개의 십리벚꽃이 유명하고 맑고 푸른 섬진강이 있어 천혜의 상춘(常春)의 고장이기에 그렇다.
 
섬진강은 길이가 212.3km로 전북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경남 하동군을 거쳐 전남 광양시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데 12개의 지천과 2개의 강이 합류한다.
 
그 지천은 전북 정읍시 산내면에서 합류하는 추령천을 비롯해 임실군 덕치면의 일중천, 순창군 적성면의 오수천과 심초천, 순창군 유등면과 풍산면 경계를 흐르는 경천, 곡성군 옥과천, 남원시 송동면의 요천과 수지천,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과 구례군 구례읍 경계인 보성강, 구례군 문척면의 황전천, 구례군 구례읍과 마산면 경계인 서시천, 구례군 간전면의 가리내, 경남의 하동군 화개면의 화개천, 하동군 하동읍의 횡천강 이 있어 아름다운 꿈을 나르고 있다.

백운산자락을 돌아 발아래는 푸른 섬진강이 흐르고 다리 건너 강변송림이 아름다운 경남하동을 우측에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섬진강을 품에 안은 한국의 훈자 광양시의 매화마을이 반긴다.
 
베일 속 뿌연 봄을 배웅하고 돌아선 빨간 동백꽃잎을 쓸어보는 동안 향긋한 매향(梅香)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피로를 말끔히 씻어낸다.

산을 오르며 조그만 쉼터에 앉아서 건너편 무덤이 보인다.

온통 꽃 천지인 곳에 잠든 고인을 찾아와 정담을 나누는 지상의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다.
 
숙종 31년(1705년)에 섬진진( 蟾津鎭)이 수월정 부근에 세워졌다고 전 하는 역사의 현장을 가는 남쪽으로 내려온 나는 섬진강을 앞에 두고 수월정(水月亭)에 올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에 왜구들이 하동 쪽에서 쳐들어와 우리 군사들이 수세에 밀려 섬진강에 이르러 진퇴양난에 처했는데 강에서 뚜꺼비 수백마리가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었다고 한다.
 
군사들이 다 강을 건너고 그 뒤를 쫓아오던 왜구들이 건너는데 두꺼비들이 모두 강속으로 들어가 버리니 왜구들이 모조리 빠져 죽었다고 전하는데 그 후로 두치강(豆恥江 )이라던 이 강을 두꺼비 강이라 해서 섬진강 (蟾津江) 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백운산 밑 죽천리 학사대 밑에 지금도 그 중보라는 저수지가 있다. 그 보 옆에 있는 일대를 중보라고도 부르는데 중보의 축조는 고려 후기라고 전 하며 수리 시설이 불충분 했던 때 논농사를 위해 보를 막아야 했지만 당시는 인구수와 기술력으로 요원한 일 이였다.
 
그 동네에는 예쁜 수절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곳과 얼마 안 되는 백운산 송천사에 젊은 스님 한 사람이 이 과부를 보고 상사병이 나 있었다.
스님은 한번이라도 만나서 하소연을 하려고 밤낮으로 이 동리 앞을 기웃거리던 어느 날 우물가에서 이 여자를 만나 염치 불구하고 애정고백을 하게 되었다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수절하는 과부로서 어찌 스님의 말을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그리도 사모했다면 이 자리에서 내기를 해서 스님이 이기면 스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다.
 
영리한 과부가 제시한 내기는 “스님은 이 자리에 보(저수지)를 쌓아 주시고 나는 삼를 베어 옷을 만들고 밥을 지어오겠습니다” 였다.

시간이 흐르고 그 여인은 밥을 지어가지고 와서 무심코 “스님 진지 드십시오” 했다 그 스님은 어느새 보를 다 막고 마직막 돌 한 덩이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님은 이 내기에서 자기가 패했다고 생각 하고 남자로서 여자에게 진 것과 좋아하는 여자가 마지막 한 순간을 안 참아 준다고 한탄하며 그 마직막 돌로 스스로 압사를 하고 말았다.
 
이를 지겨보던 여인도 자기가 너무 경솔 했다고 생각하고 자기 때문에 젊은 청춘을 죽게 했다며 후회하고 또 과수가 젊은 사내의 사모를 받았으니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 여자도 돌에 깔려 자살 했다.
 
이 후 이보를 중이 막았다 하여 “중보거리”라 부른다는 전설이 백운산자락을 맴돌고 있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